유식삼십송

제27송 가행위

문선광 2006. 12. 16. 22:16

제27송 가행위


1) 송문


현전입소물(現前立少物) 위시유식성(謂是唯識性) 이유소득고(以有所得故) 비실주유식(非實住唯識)


2) 풀이


현전의 경계에 어떤 것을(少物)을 세워 공(空)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유식의 자성(自性)이라고 여기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소득(所得)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진실로 유식에 정주(定住)하는 것이 아니다.


3) 해설


수행자가 발심하여 결택식(決擇識)을 일으켜 유식성에 주(住)하고자 발심하는 것을 자량위라 하며, 발심을 더욱 분발하여 증진수행하는 것을 가행위(加行位)라 한다. 수행자가 자량위에서 유식 30위(位)를 원만하게 닦고 나서 십지(十地)수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선근(四善根)을 닦아야 하는데, 이러한 사선근을 닦는 계위가 바로 가행위이다.


보살이 무엇을 어떻게 수행하여 가행(加行)정진할 것인가를 안다면 이미 수행의 바른길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은 수행의 도상에 사심사관(四尋思觀)이라는 관법(觀法)을 닦아서 소취인 경계가 공함을 깨닫고 계속해서 사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서 능취(마음의 경계)와 소취가 모두 공함을 깨닫는 것이다.


수행자가 4심사관(尋思觀)을 닦아 4여실지(如實智)를 증득(證得)하는 과정에 반드시 4선근(善根)의 위(位)를 체험하게 되는데, 난위(暖位), 정위(頂位), 인위(忍位), 세제일위(世第一位)의 네 가지를 말한다. 수행자가 4여실지를 닦아서 향상된 견도(見道)로 취향해 갈 때 다음과 같은 4선근을 체험하면서 점차 '무루지혜(無漏智慧)'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는 명심사관(名尋思觀)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중생들은 물론 축생이나 사물에도 모두 이름이 있으나 그 이름은 모두 가립(假立)된 것으로 사물의 본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항상 그 이름에 집착을 하여 희로애락의 감정을 일으키고 서로 다투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오직 가명일 뿐이요 실(實)이 아닌 그 이름(名)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그것은 모두가 공(空)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 이름이나 모양(名相)'에 동(動)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실(實)에 주(住)하는 것이 명(名)을 심사관찰하는 명심사관(名尋思觀)이라 한다.


둘째는 사심사관(事尋思觀)이다. 사(事)는 작(作)의 뜻으로 일체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온, 십이처, 산, 물, 바다, 사람, 짐승, 결혼, 생사 이 모든 것이 사(事)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물이나 형식 등은 모두 '인연에 의하여 생멸(因緣所生)'하고 '마음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唯識所現)'으로 인연과 식(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와 같이 실체가 없고 자성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찰나 변멸(變滅)하는 '당체가 곧 공(當體卽空)'이며, '존재하는 것 같으나 실지로 존재하지 않는' 허망하게 변현(變現)된 모든 사물에 대하여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인 가상(假相)에 미혹되지 않도록 그 실체를 심사관찰하는 것을 사심사관(事尋思觀)이라 한다.


셋째는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으로서 자성이란 모든 존재(每一法)의 자체성(自體性)이며, 독립성을 말한다. 그러나 법성 또는 자성은 본래 무소유이며, 공(畢竟空)이며, 허망한 분별만이 있을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제법의 자성이 허공과 같음을 심사관찰하여 허환의 집착을 여의는 것을 자성심사라 한다.


넷째는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이다. 차별이란 명(名)과 사(事)의 갖가지 차별상을 말한다. 명(名)의 차별에는 음(音), 의(義) 등이 있고 사(事)의 차별에는 대소, 방원(方圓), 고저, 선악, 유루, 무루와 생주이멸(生住離滅)의 부동 등 무량한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 수행을 할 때 제법의 차별상에 대하여 심사관찰하여 그 실상을 깨닫는 것을 차별심사관이라 한다.


이상의 사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서 얻어지는 지혜를 사여실지(四如實智)라 하는데 여실(如實)이란 실성과 같다는 뜻으로 진여를 말한다. 모든 법을 심사관찰하여 지혜를 얻고 지혜가 생기면 모든 법의 명, 사, 자성, 차별이 진여실성과 같아서 모두가 공이며, 무소유임을 깨달아 모든 분별을 여의므로서 근(根), 진(塵)의 경계가 아닌 유식실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4심사관을 닦음으로서 4여실지를 얻고 4여실지를 얻음으로서 유식실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4심사관(四觀)과 4여실지(四智)는 유식을 수행하는 기본방편으로서 아직 결택되지 않았을 때를 인위(因位)라 하고 관(觀)에 의해서 지(智)가 생기고 일체법을 결정적으로 요해하여 성공의 단계에 도달하면 과위(果位)라 한다.


4심사관을 닦아 명, 사, 자성, 차별이 모두 유식에 의해 생긴 것이며, 방편으로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식을 떠나서는 일체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지혜를 무상지(無上智)라 하며, 모든 법의 실성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여실지(如實智)라고도 한다. 수행자는 4심사관(尋思觀)을 닦아서 4여실지(如實智)를 얻어 일체의 허망분별심을 여의는 것으로 불도(佛道)의 본분을 삼아야 한다.


4심사관과 4여실지를 수행함에는 반드시 위차(位次)가 있는데, 이를 사선근(四善根)이라 한다. 4선근은 난위(暖位), 정위(頂位), 인위(因位), 세제일위(世第一位)의 네 가지이다. 이 4위 중에서 난위와 정위는 4심사관을 닦아 일체만법의 경계인 소취(所取)가 공(空)함을 관하고 인위와 세제일위는 4여실지를 닦아 능취(能取)와 소취가 모두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다.


①난위(暖位)--성유식론에서 명득정(明得定)으로 하품심사관(下品尋思觀)을 닦아 소취가 없음을 난위라 한다고 했다. 명득(明得)은 선정의 명칭으로 명(明)은 무루적 지혜, 광명이며, 난성(暖性)에 속한다. 여기서 명(明), 사(事), 자성(自性), 차별(差別) 네 가지가 모두 분별식에 의해 잠시 있다가 없어지고 마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위는 광명난법(光明暖法)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난위라 한다.


②정위(頂位)--이 위는 명증정(明增定)으로 상품심사관(上品尋思觀)을 닦아 소취가 없음을 정위라 한다고 했다. 명증(明增)이란 선정의 명칭으로 관(觀)이 더욱 깊어져서 광명이 증장되고 지혜가 향상됨을 말한다. 이 위는 명상(明相)의 광염(光炎)이 이전과 비교하여 더욱 치성하기 때문에 명증정이라 하고 심사(尋思)의 자리가 여기에 이르러 극점(極點)에 도달하므로 정위(頂位)라 하는 것이다.


③인위(忍位)--이 位는 인순정(印順定)으로 하품여실지(下品如實智)를 닦아서 소취가 없는 곳에 정념(定念)을 이루고 능취가 없는 가운데 정념을 즐기므로 인위라 한다. 인순(印順)이란 선정의 명칭이며, 앞의 난, 정 2위에서 4심사관을 인지(印持)하여 소취가 공함을 관하고 한편으로 뒤의 세제일법을 수순하여 2취가 모두 공하다(二取皆空)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인순정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暖), 정(頂) 2위를 경과하여 소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치에 대해서는 인지(印持)하고 있으나 능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치에 대해서는 결정적으로 인지하지 못하여 단지 순락순인(順樂順忍)할 따름이다. 따라서 능취가 공(空)하다고 관(觀)하는 지(智)는 아직도 스스로 유유자적하게 운용할 수 없고 심식(心識)에는 능취소견(能取所見)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인력(忍力)이 더해져야 하므로 인위라 한다.


④세제일위(世第一位)--이 위는 무간정(無間定)에 의해서 상품여실지(上品如實智)를 닦아서 능취와 소취가 모두 공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세제일위라 한다. 이 위는 중간에 끊어짐이 없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무간정이라 한다. 이미 상품여실지를 발하여 능취와 소취가 모두 공함을 인지(印持)하였으나 아직 세간법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세제일위라 한다.


송문 제1구 현전입소물(現前立少物)과 제2구 위시유식성(謂是唯識性)에서 소물(少物)이란 수행자가 집착하여 존재한다고 여기는 유식성을 가리킨다. 마음은 원래 언설(言說), 심연(心然), 형상(形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소물을 세워 유식성이라 여긴다면 유식실성을 밝힐 수 없음을 밝힌 송이다.


성(性)은 언설(言說) 심연(心緣)과 형상시설을 떠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희론에 속한다. 수행자가 비록 가행위를 닦아 2취(取)가 공함을 인지하고 유식상(唯識相)이 공함을 요해하더라도 유식성을 집착하여 존재한다고 여기는 상황하에서 비록 소물(少物)이라도 가립(可立)함이 있으면 유식성이 아니다.


제3구 이유소득고(以有所得故)와 제4구 비실주유식(非實住唯識)에서 유소득견(有所得見)은 견성의 대장애(大障碍)라는 것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학자가 만약 무소득의 제리를 요해하면 진견도(眞見道)에 증입(證入)할 수 없다. 득(得)자의 의미는 물(物)은 본래 존재함이 없으나(空)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득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정(有情)의 불성(佛性)과 무정(無情)의 법성(法性)은 본래 존재하고 지금도 존재하며, 미래제(未來際)가 다 하도록 존재하지만 이는 원래 무래무거(無來無去)의 진공(眞空) 절대적인 것으로 득(得)이다 부득(不得)이다 말하는 것은 모두 적절하지 않으며, 이러한 언설(言說)로 유식성을 표현할 수 없다. 만약 유식성이 존재한다는 유소득견(有所得見)에 주(住)한다면 2취가 공이 아니라서 유식실성을 증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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