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광복 후의 불교
가.왜색불교 정비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불교 역시 일본 불교의 지배와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아 오면서 왜색불교의 잔재인 대처승(帶妻僧)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종결짓지 못한 상태에서 불행하게도 6·25 동란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찰과 불교재산이 모두 소실되거나 훼손되어 우리나라의 불교는 거의 폐허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일제시대에 만든 법령과 제도의 정비였다. 한국불교조계종은 1945년
9월 22일부터 23일까지 전국의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일제의 사찰령(寺刹令)과 태고사법(太古寺法) 및 31본말사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한국불교의
종헌(宗憲)을 제정키로 결의한 다음 초대 교정(敎正)에는 박한영(朴漢永)스님을 선출하고 중앙총무원장에는 김법린(金法麟) 스님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6. 25전란이 끝난 뒤인 1954년 5월 21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帶妻僧)들은 사찰에서 퇴거하라'는 왜색불교
척결을 골자로 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힘을 얻은 비구승들은 그 해 6월 20일 중앙교무회(中央敎務會)를 개최하여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을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으로 하고 '조선불교 교정'이라는 책임자 직명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宗正)'으로 고치는 등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였다.
나.체제의 재정비
정권의 도움으로 종권(宗權)을 잡게된 비구승이 중심이 되어 수송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 간판을 내리고 조계사(曹溪寺)라는 간판을 걸고 '조계종총무원(曹溪宗總務院)'으로서의 종무(宗務) 집행을 시작하자(1955년 1월) 이에 반발한 대처승(帶妻僧)들은 사간동에 있는 법륜사(法輪寺)에 같은 '조계종총무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별도의 종무집행을 시작함으로서 같은 종단 안에 두 개의 간판이 걸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분리된 비구승파와 대처승파의 대립은 법정 소송으로까지 이어지는 등 상당한 기간 대립이 계속 되다가 1962년 1월
양파에서 불교재건을 위한 '불교재건위원회'를 결성하여 통합종단을 만들고 그 해 4월 종정(宗正)에는 비구승 출신인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는 대처승인 임석진 스님을 선임하여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이라는 명칭으로 문교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외면적으로는 통합이 되었으나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통합이 되었기 때문에 1969년 3월
대처승 측에서 다시 분종(分宗)을 선언하면서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이라는 새로운 종단을 창종하여 1970년 5월 문화공보부에 등록하고
다시 2년 후인 1972년 5월에는 조계종 종단에 남아 있던 대처승들까지 모두 데려가서 대처승들만의 종단으로 일원화하였다.
그리고 1974년 12월에 열린 정기 종회(宗會)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공휴일로 제정하기 위해서 청원서명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고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실시하여 불교신자들은 물론 많은 일반국민들과 정부의 호응을 얻음으로서 서명운동을 시작한지 2개월 만인 1975년
1월에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그 해부터 부처님 오신날인 음력 4월 8일을 법정 공휴일로 제정 시행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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