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불교

2. 통일신라의 불교(구산선문, 원효, 의상스님, 석굴암, 불국사)

문선광 2005. 6. 20. 17:13

2. 통일신라의 불교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될 당시는 왕실과 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이를 받아드렸으나 점차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삼국을 통일 할 당시에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불교를 신봉함으로서 국민의 국가에 대한 호국사상이 앙양되고 승려들의 잦은 유학과 해외활동으로 인한 국위의 선양은 물론 선진화된 당 나라의 문화를 직접 수입함으로서 불교문화의 융성과 함께 새로운 민족문화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국가적 지원과 함께 보호를 받으며, 지나치게 발전함에 따라 사원전(寺院田)이 확대되어 국고수입은 감소되고 승려들의 수가 점차 늘어남으로서 노동력의 부족현상을 초래하였으며, 대형사찰과 수많은 불상, 불탑의 건립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낭비와 귀족들의 지나친 사치생활로 인한 국가경제의 소모는 결국 국력의 쇠퇴로 연결되면서 고려가 일어나고 신라가 망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가. 양종의 성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신라불교는 대규모의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과 불탑을 세우고 범종을 제작하면서 왕실과 귀족들의 안녕과 복을 비는 대신에 승려들은 국가로부터 수많은 땅과 노비를 하사 받고 부를 축적하는 등 봉건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타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 귀족들 내부에서는 골품제의 모순으로 인한 권력다툼이 계속되고 지방에서는 새로운 호족들이 등장하여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복잡한 교리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새로운 불교인 선불교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자 이제까지의 귀족불교, 교리불교에 염증을 느끼던 지방 호족들이 앞장서서 이를 받아드렸는데, 9세기초에 도의선사에 의해서 창설된 가지산파를 시발로 고려 초까지 100여 년 동안에 모두 9개의 선문(禪門)이 창설되면서 기존의 교종과 더불어 선(禪)·교(敎) 양종으로 대립하게 된다.


1) 교종의 종파

 

교종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기를 전후해서 왕실과 중앙정부의 귀족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모두 다섯 개 종파인 오교(五敎)로 분리되는데, 경복사를 중심으로 하는 보덕의 열반종(涅槃宗)과 통도사를 중심으로 한 자장의 계율종(戒律宗), 분황사를 중심으로 한 원효의 법성종(法性宗)과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상의 화엄종(華嚴宗),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진표의 법상종(法相宗) 등 모두 다섯 개 종파이다.


정토종(淨土宗)은 이들 다섯 개 종파와는 별도로 원효에 의해서 널리 전파된 신앙중심의 종파로서 참선수행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학식이 부족하여 경전상의 교리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더라도 오직 '나무아미타불'만 일심으로 염불하면 임종시에 아미타부처님이 직접 찾아와서 극락으로 데려간다는 단순한 교리 때문에 일반 서민대중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널리 신앙되었다.


2) 선종의 성립


가) 선법의 전래

 

중국의 선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 온 것은 통일신라 초기로서 달마선(達磨禪)이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인 서기 800년경에 법랑(法朗)대사가 중국 선불교의 4조 도신(道信)선사로부터 선법(禪法)을 전수 받아 도입하였고 이어서 신수(神秀)의 북종선이 들어왔으며, 혜능(慧能)의 남종선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문하에서 수학한 도의(道義)선사에 의해서 최초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뿌리깊은 교종 중시사상으로 인해서 선불교가 자리잡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었기 때문에 부득이 지방으로 내려가서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사찰을 세우고 선문을 열었는데, 그것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시작이다. 이들 구산선문은 다같이 혜능의 법맥을 이어받은 하나의 종파로서 기존의 교리중심의 교종에 대비되는 뜻으로 선종(禪宗)이라고 하였다.


나)구산선문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신라 말에서부터 고려 초까지 당 나라에 유학하면서 법을 배운 선승(禪僧)들이 귀국하여 개산한 선종(禪宗)의 아홉 개 산문을 말하는데, 서기 828년 홍척(洪陟)대사가 세운 지리산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 100여 년이 지난 고려 태조 18년(서기 935)에 마지막으로 긍양(兢讓)대사가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산함으로서 모두 아홉 개의 선문이 되었다.


(1) 가지산문
혜능의 4세손이며, 마조도일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선법을 이어받은 도의(道義)선사가 헌덕왕 13년(서기 821) 당 나라에서 귀국하여 법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신라 사람들은 이를 마설(魔說)이라 비방하면서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서 그곳에 칩거하면서 제자 염거(廉居)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염거는 다시 그의 제자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하였다.


체징(體澄, 서기 804-880년)은 좀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좀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하여 당 나라로 건너가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법(法)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법조(法祖)인 도의선사가 물려준 것 외에는 더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신라 제46대 문성왕 2년(서기 840)에 급거 귀국하여 가지산(迦智山)으로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선사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아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산하였다.


(2) 실상산문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洪陟)이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문하에서 법을 얻은 다음 신라 제42대 흥덕왕 원년(서기 826)에 귀국하여 2년 후인 서기 828년에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무수무증심인법(無修無證心印法)을 종지(宗旨)로 지금의 실상사에서 산문을 열었는데, 창건 당시에는 지실사(智實寺)라 하였으나 고려 초에 국사의 존칭인 '실상선정국사(實相禪定國師)'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실상사(實相寺)라 하였다.


홍척(洪陟)은 도의(道義) 보다 훨씬 늦게 귀국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선문을 연 것은 제일 먼저이다. 실상사는 정유재란 때 왜구들에 의해서 절이 전소되는 큰 피해를 입었고 그 후 이곳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설화가 생겼는데, 가람을 일본으로 향하게 배치하고 범종(梵鐘)에 일본열도를 그려 놓아 아침저녁 예불 때마다 그 부분을 두들겨 팬다고 한다.


(3) 동리산문
혜철(慧哲 서기 784-861년)이 당 나라에 유학하면서 서당지장 선사로부터 '무설지설(無說之說) 무법지법(無法之法)' 즉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 없는 가운데 있는 법'이 해동(海東) 땅에 전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하면서 전해주는 심인을 전수 받고 귀국하여 신라 제46대 문성왕 원년(서기 839)에 전남 곡성군 동리산(棟裏山) 태안사(泰安寺)에 선지(禪旨)를 펴고 동리산문(棟裏山門)을 열었다.


이후 선사의 법을 이은 풍수도참설의 대가이며, 고려의 개국을 예언하였던 도선국사(道詵國師, 서기 827-898년)와 광자대사(廣慈大師, 서기 864-945년)가 고려 태조 왕건의 도움을 받아 태안사를 동리산문의 중심사찰로 하고 백여 채의 당우를 지어 천여 명의 스님이 상주하는 대찰로 조성하였는데, 한 때는 송광사(松廣寺)와 화엄사(華嚴寺) 등 전남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사찰이 모두 태안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4) 봉림산문
봉림산문은 원감국사 현욱(玄昱)의 제자인 진경심희(眞鏡審希)가 경남 창원 봉림산에 봉림사(鳳林寺)를 세우고 개산한 선문이다. 현욱은 신라 제41대 헌덕왕 때 당 나라에 유학하면서 마조도일의 제자 백장(白丈)선사로부터 심인(心印)을 얻고 신라 제43대 희강왕 2년(서기 837)에 귀국하여 지리산 실상사와 혜목산 고달사(高達寺) 등지에서 법을 펼치다가 제48대 경문왕 8년(서기 868)에 입적하였다.


현욱(玄昱)의 법을 이은 진경심희는 스승이 돌아가시자 열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설악산 일대의 산사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김해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김해 진례(進禮)에 이르러 지방 호족들의 도움으로 초가로 된 이름 없는 작은 절을 보수하여 절 이름을 봉림사로 고치고 그곳에서 봉림산문(鳳林山門)을 열었다.


(5) 사자산문
사자산문(獅子山門)은 철감(哲鑑) 도윤국사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 서기 831-895년)이 신라 제46대 문성왕 9년(서기 847)에 강원도 영월 사자산 흥녕사(興寧寺)에 문을 연 구산선문 중 규모가 가장 컸던 선문으로 이곳은 7세기 중엽에 자장율사가 당 나라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는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이다.


도윤(道允)은 헌덕왕 17년(서기 825)에 당(唐) 나라로 들어가서 마조도일의 제자 남전보원에게 법을 얻고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에서 종풍(宗風)을 떨치다가 입적한 후 제자 징효절중이 수백명의 제자들과 함께 흥녕사로 옮겨 사자산파를 이루었다. 이후 흥녕사는 여러 차례의 재난을 겪으면서 사리탑을 공양하는 작은 절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근년에 와서 절을 중창하고 법흥사(法興寺)로 이름을 고치었다.


(6) 성주산문
충남 보령 성주산문(聖住山門)의 중심사찰인 성주사는 백제 제29대 법왕이 왕자로 있을 때인 서기 599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세운 사찰로 원래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 하였으나 신라 제46대 문성왕 9년에 무염(無染)국사가 절을 중창한 후 왕명으로 성인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 하여 성주사(聖住寺)라는 절 이름이 내려졌다.


무염은 무열왕의 8대 손으로 13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득도(得道)하고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배우다가 제41대 헌덕왕 13년(서기 821) 당 나라로 들어가서 마조도일의 제자 마곡보철에게 법을 얻고 스승이 돌아가시자 '큰 배(大船)가 버려졌는데 작은 배(小舟)가 어찌 매여 있으리요' 하면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여 동방대보살(東邦大菩薩)이라는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무염은 귀국 후 성주사에 머물면서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것이 올바를 길'이라는 무설토론(無說吐論)을 주장하여 문하에 2천 명이 넘는 제자가 있었으며, 신라 제48대 경문왕과 제49대 헌강왕의 국사로 지냈는데, 입적 후 낭혜화상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해 절이 소실된 후 그대로 방치되어 세 개의 석탑 등 석조물만 남아 있다.


(7) 사굴산문
사굴산문(捨堀山門)은 신라 제46대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강원도 강릉에 굴산사(堀山寺)라는 절을 세워 개산한 선문이다. 그 곳에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한 처녀가 석천(石泉)에서 바가지 속에 해가 들어있는 물을 마시고 13개월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뒷산 학 바위 밑에 내다 버렸더니 학과 산짐승들이 아이를 보호하고 있어서 도로 데려와서 키운 아이가 범일(梵日)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범일국사가 당 나라에 유학 중 왼쪽 귀가 떨어져 나간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범일에게 귀국하거든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서 자기 집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기에 그 스님이 일러준 곳을 찾아서 집을 지은 곳이 바로 강릉 학산리 일대의 굴산사(堀山寺)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석천 앞에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을 비롯한 당간지주와 부도탑 등 일부 석조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범일은 굴산사에서 40년을 수행하는 동안 한 번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고 경문왕과 헌강왕, 정강왕의 귀의를 받고 진성여왕이 선(禪)과 교(敎)의 뜻을 물었을 때 석가모니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이 아니고 진귀조사(眞歸祖師)를 만나서 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하면서 부처님이 깨치신 여래선 보다 우월한 것이 바로 조사선이라고 주장한 그는 지금도 강릉 단오제의 성황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8) 수미산문
고려 태조 15년(서기 932) 황해도 해주에 광조사(廣照寺)를 짓고 이엄(利嚴 서기 870-936년)을 맞이하여 법을 전승토록 한 것이 수미산문(須彌山門)이다. 이엄은 12세에 가야 갑사(岬寺)로 출가하여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10년(서기 896)에 당 나라로 들어가서 동산양개(洞山良价)의 제자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문하에서 6년 동안 수행하면서 법을 얻은 후 신라 제52대 효공왕 15년(서기 911)에 귀국하였다.


광조사는 진철대사 이엄(利嚴)을 아끼던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 서기 932년에 창건되었는데, 그때 이엄의 나이 63세에 이르렀으나 그의 선풍을 사모하여 모여든 구도자가 꾸준히 늘어나서 산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조사는 이미 오래 전에 소실되고 지금은 진철대사 이엄의 보월승공비(寶月昇空碑)와 오층석탑만 남아 있는 것으로 황해도지에 기록되어 있다.


(9) 회양산문
경북 문경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천년 고찰 봉암사(鳳巖寺)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7년(서기 881)에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창건한 희양산문(曦陽山門)의 중심 사찰이며, 조계종 특별 선원으로 일반인은 물론 불자들의 출입도 엄격하게 통제되는 오직 하나 뿐인 청정수행의 참선도량으로 1년에 단 하루만 굳게 닫힌 산문을 열고 일반에게 공개되는데, 그 날이 바로 4월 초파일이다.


지증대사는 봉암사를 완공한지 3년 후에 입적하였으며, 그로부터 얼마 후 문경은 견훤과 왕건의 격전장이 되는 바람에 이곳 봉암사도 극락전만 남는 전란의 피해를 입고 폐허가 되면서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으나 고려 태조 18년(서기 935)에 정진(靜眞)대사 긍양(兢讓)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절을 크게 중창하여 구산선문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문을 연 곳이 바로 이곳 희양산문이다


봉암사는 창건 이후 수 차례의 화재와 병화로 인해서 절이 심하게 소실되고 파괴되었으나 극락전은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는 왜병들이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지붕 위에 올려놓아도 불이 붙지 않아서 그대로 건재할 수 있었으며, 지난 1947년 성철스님과 청담·자운·향곡·월산·혜암·법전 스님 등 20여명이 모여서 조선과 일제 강점기에 짓밟히고 허물어진 불교중흥을 위한 결사를 맺은 곳이다.


나. 이름난 스님


1) 낭지

낭지화상은 경남 양산에 있는 영축산(靈鷲山) 혁목암(赫木庵)에 머물러 있으면서 주로 법화경을 강설하였으며, 화엄경에도 무척 밝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의하면 그는 수시로 구름을 타고 중국의 화엄도량인 청량산(淸凉山, 五臺山)으로 날아가서 그곳에 상주하는 문수보살을 만나 강설을 듣고 돌아왔다고 하며, 사미시절의 원효대사를 지도한 스승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2) 혜공

혜공(慧空)은 귀족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던 노파의 아들이었으나 자라면서 범상치 않는 일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주인이 면천시켜 주었더니 그 길로 출가하여 법화신앙에 충실한 승려가 되어 많은 이적을 남긴 분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삼국유사 의해편 이혜동진조(二惠同塵條)에 오어사(吾魚寺)라는 절 이름과 관련된 설화 한 토막이 있는데, 혜공과 원효와의 사이에 벌어진 내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어사의 원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였는데, 하루는 두 스님이 절 앞으로 흐르는 시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같이 변을 본 후에 혜공이 원효에게 '너의 것은 똥(汝糞)이고 내 것은 고기(吾魚)'라고 해서 절 이름을 오어사로 고쳐지었다는 설화이다.


오어사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에 창건된 절로서 원래의 이름인 항사사는 항하(간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속세를 벗어난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절이 소재하고 있는 운제산(雲梯山)에는 원효, 혜공, 의상, 자장 등 네 분 조사의 이름을 딴 암자가 그대로 남아 있으나 절 앞을 흐르던 계곡은 호수로 변하고 원효와 혜공이 놀았다는 광석대(廣石臺)도 물 속에 잠겨 버렸다.


3) 대안

대안화상(大安和尙)은 생김새가 특이하고 장터거리에서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하고 동발(銅鉢)을 두드리면서 대안(大安), 대안이라고 외치고 다녔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리고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바다 속 용궁에서 구해온 금강삼매경을 편집한 사람으로서 원효가 이 경의 주석서인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지을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라고 한다.


4) 원효

원효(元曉 서기 617-686년)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에서 제31대 신문왕 때까지의 스님으로 신라 법성종(法性宗)을 개창한 분이다. 그는 진평왕 39년(서기 617) 경산 자인(慈仁) 밤실(栗谷)이라는 곳에서 육두품의 평민 출신 담나(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밤나무 밑에서 털옷을 가리고 출산하였다고 해서 이름을 서당(誓幢)이라 하고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 하였으며, 그가 태어난 곳에 사라사(娑羅寺)라는 절을 세웠다.


그는 나이 16세에 출가하여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불법(佛法)을 배웠는데, 당시 백제 고대산(全州)에 와 있던 고구려 출신의 승려 보덕(普德)을 찾아가서 열반경과 유마경의 강설을 듣고 다시 영축산 혁목암(赫木庵)으로 낭지화상을 찾아가서 법화경을 배웠으며, 나이 34세 때인 서기 650년 의상과 함께 당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압록강을 건너다가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간첩혐의로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하였다.


첫 번째의 유학에 실패한 그들이 다시 유학의 길에 나선 것은 원효의 나이 45세 의상의 나이 37세 때인 서기 661년의 일이다. 두 사람이 함께 당 나라로 가던 중 당항성(黨項城, 지금 화성군 남양) 부근 무덤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갈증을 못 이겨 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셨는데, 이튿날 날이 밝은 후 다시 그것을 살펴보았더니 물이 고여 있던 그 바가지는 바로 해골바가지였던 것이다.


마실 때 그토록 시원하던 물이 해골바가지를 보는 순간 심한 구토를 하면서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 즉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진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터득하고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데 어디서 어떤 법을 구한단 말인가 당 나라에 있는 진리라면 신라에는 왜 없단 말인가 진실한 마음공부는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혼자 발길을 돌리었다.


두 번째의 유학 길에서 돌아온 원효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즉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준다면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고 하면서 외치고 다녔는데, 원효의 이러한 말과 행동을 본 다른 사람은 그 뜻을 잘 몰랐으나 태종 무열왕은 원효의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전장에서 남편을 잃고 외롭게 지내던 딸 요석(瑤石)과 인연을 맺어주기로 작정하였다.


어느 날 무열왕은 측근들에게 이르기를 '원효 성사가 귀부인을 얻어서 어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나라에 어진 인재가 있으면 그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고 하면서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요석궁(瑤石宮)으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궁리들이 무열왕의 칙명을 받고 원효를 찾아가고 있을 때 원효는 이미 궁궐 앞에 있는 문천교(蚊川橋) 다리 밑으로 떨어져서 옷을 몽땅 적시고 있었다.


궁리들이 물에 빠진 원효를 건져 요석궁(瑤石宮)으로 데려갔더니 공주는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모셨고 이들 두 사람이 3일간의 꿈같은 만남으로 인해서 태어난 이가 바로 설총(薛聰)이다. 이러한 일을 두고 학자들 간에는 원효가 파계를 했느냐 여부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당시의 신라 귀족들과 불교교단에서는 원효를 파계승(破戒僧)이라고 비난하면서 상대를 하지 않았다.


원효는 종래의 인습적이고 형식적인 계율관(戒律觀)을 타파하여 스스로를 파계승이며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자처하면서 세속인의 복장을 하고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즉 '모든 것에 걸림이 없어야 한 길에서 나고 죽는 것을 벗어난다'는 무애가를 부르고 다녔는데, 이 무애의 노래는 비록 화엄경에서 따온 구절이지만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한 독백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원효는 대궐에서 나온 뒤로는 주로 분황사에 있으면서 반야(般若)와 유식(唯識), 법화(法華) 등 특정교리에 편향되지 않는 독자적인 통불교를 제창하면서 민중 속에 불교가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을 보급시키는데 노력하면서 저술에도 힘을 기울여 모두 90여 종류 2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하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20여 종 뿐이다.


원효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낭지(朗智), 혜공(慧空), 대안(大安) 등 서민층을 상대로 하였던 세분의 스님들은 국내파 스님으로서 그 이름은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원광(圓光), 자장(慈藏), 의상(義湘)과 같은 해외 유학파에 버금가는 큰 인물로서 원효와는 항상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고 특히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얽힌 다음과 같은 설화는 그것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설화의 내용은 [신라왕의 왕후가 심한 종기에 걸렸는데 왕과 왕자 신하들이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라서 부득이 어떤 무당에게 물었더니 '멀리 다른 나라로 가서 약을 구해와야 병이 낳는다'고 하여 당 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약을 구해오게 하였는데, 그들을 태운 배가 바다 가운데 이르렀을 때 문득 한 노인이 파도를 해치면서 배 위로 올라와서 사자를 데리고 용궁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용궁으로 들어가자 검해(鈐海)라는 용왕이 나타나서 '우리 궁중에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경이 있는데, 그대 나라 왕비의 병에 의탁해서 상승(上乘)의 인연을 짓고자 하니 대안(大安)화상으로 하여금 흐트러진 경의 차례를 바로잡아 책을 매도록 하고 원효법사가 경소(經疏)를 지어 강설(講說)하게 하면 왕후의 병은 틀림없이 낳을 것'이라고 하면서 30여장의 흐트러진 경을 주더라고 한다.


사자들이 가지고온 경(經)과 함께 자초지종을 들은 왕은 즉시 대안성자를 불러 경의 차례를 정하고 성책(成冊)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왕명을 받은 대안은 '나는 왕의 궁궐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여기로 가져오도록 하라'고 하여 사자가 그 경을 가지고 갔더니 흐트러진 경전을 시장 바닥에 펴놓고 앉은 채로 동발(銅鉢)을 치면서 차례대로 배열하여 8품으로 만들었는데, 모두 부처님의 뜻에 합치되었다]고 한다.


원효가 대안이 성책(成冊)한 경전과 함께 소(疏)를 지으라는 왕의 명을 받은 것은 고향에 있을 때였는데, 사자에게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라는 두 각을 종(宗)으로 삼고 있으니 내가 각승(覺乘)을 지을 수 있도록 안궤를 마련하라'고 하여 소달구지 위에 앉아서 경론(經論) 다섯 권을 지었는데, 책이 완성되던 바로 그 날 밤 누군가 강론을 방해할 목적으로 책을 모조리 훔쳐 가버렸다.


원효는 그가 번역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광소(廣疏) 5권을 분실하게된 경위를 임금에게 고하고 다시 말미를 얻어서 약소(略疏) 3권을 새로 지어 황룡사에서 강설하였는데, 이 강론을 듣기 위해서 경향각지에서 출가와 재가의 불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으며, 원효의 강론은 뜻풀이가 워낙 정연하고 절실해서 참석했던 모든 대중들을 크게 감동시켰다고 한다.


금강삼매경은 부처님께서 금강삼매에 들었다가 선정으로부터 나와서 설하신 총 8품의 경전으로 원효가 지었다는 다섯 권의 '금강삼매경론'은 행방을 알 수 없으나 새로 지은 '금강삼매경 약소 3권'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공사상이 깊이 투영되어 있으며, 내용이 완벽하고 강력한 관행(觀行) 체계와 철학성(哲學性)을 갖춘 주석서로 알려져 있다.


원효는 주로 황룡사(黃龍寺)와 분황사(芬皇寺), 오어사(吾魚寺), 사라사(娑羅寺), 초개사(初開寺), 혈사(穴寺) 등에 머물렀는데, 분황사는 집필지였고 사라사는 태어난 고향에 세운 절이며, 초개사는 자신이 살던 집을 개조하여 세운 절이고 혈사는 입적하기 전에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신문왕 원년(서기 686년)에 입적하였으며, 아들 설총이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원효에게는 그가 입적한 후 4백여 년이 지난 고려 숙종 6년(서기 1101)에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명종 2년(서기 1171년)에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분황사에 화쟁국사탑비(和諍國師塔碑)를 세웠다. 그리고 경남 양산에 있는 척판암(擲板庵)에는 그가 초지보살(初地菩薩)의 신통력으로 중국까지 밥상을 던져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다음과 같은 설화 한 토막이 전해지고 있다.


설화는 [원효가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려고 하다가 자기의 혜안(慧眼)으로 서쪽방향을 살펴보았더니 중국에 있는 오래된 큰절이 막 허물어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 절에는 천명(千名)의 학승들이 저녁 공양을 시작할 무렵으로서 그대로 두면 수많은 학승들이 압사 당할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그 순간 원효는 밥상 위의 그릇을 재빨리 내려놓고 절이 있는 쪽을 향해서 힘껏 소반을 집어던졌다.


그때 중국의 그 절에서는 저녁공양을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이상한 물체가 나타나서 윙윙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공양주가 그 물체를 먼저 발견하고 소리를 질러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였는데, 그 물체는 천천히 돌아가다가 절 옆 초원으로 가서 떨어져 내렸으며, 모든 사람들이 떨어진 물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달려가는 순간 큰 절 전체가 와르르 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학승들이 달려가서 떨어진 물체를 확인해보니 나무로 만든 밥상인데, '해동원효척반구대중(海東元曉擲盤救大衆)' 즉 '해동의 원효가 밥상을 던져서 대중을 구하노라'고 적혀 있었다. 학승들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고 신라를 향하여 합장공경의 예를 올리고 있는데, 밥상은 다시 허공으로 올라가서 동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때 천명의 학승들도 함께 그 밥상을 따라서 신라 땅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설화의 진위야 어찌되었건 간에 초지보살의 단계에 이른 원효의 혜안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요익중생(饒益衆生)의 행'으로 설화는 여기에서 끊어지지 않고 다시 이어져서 조선조 말의 범해(梵海) 각안(覺岸)선사가 편집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나오는 동래 금정산 '원효암(元曉庵)과 화엄벌(華嚴伐)의 설화'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초지보살이란 화엄경에 나오는 보살의 수행계위인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와 등각(等覺), 묘각(妙覺) 등의 52계위 중 십지(十地)의 초지(初地)에 해당하는 환희지보살을 말하는데, 환희지란 처음으로 참다운 중도의 지혜를 내어 불성(佛性)의 이치를 보고 견혹(見惑)을 끊으면서 자리이타(自利利他)함으로서 희열에 가득 찬 지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설화는 [원효가 밥상을 던져서 목숨을 구한 천명의 대중들이 밥상을 따라 신라로 찾아 왔는데, 원효는 이들을 데리고 수도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양산 하북면 용연리에 이르렀을 때 원적산(圓寂山) 신령이 마중을 나왔다가 이 산에는 꼭 천명이 수도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머무르도록 하라고 하여 신령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갔으니 신령은 지금의 산령각 입구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할 수 없이 원효는 왼쪽 골짜기로 들어가서 대둔사(大屯寺)를 창건하고 상(上), 중(中), 하(下) 내원암과 89개소의 암자를 창건하여 천명의 대중을 머물게 하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도(道)를 닦게 하였는데, 이들 천명의 대중들을 산꼭대기에 모아놓고 화엄경을 설하던 장소를 화엄벌(華嚴伐)이라 하고 암자에 흩어져 있던 대중들을 모으기 위해서 산봉우리에 큰북을 설치하고 울렸던 봉우리를 집북봉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천명의 대중들 가운데 988명은 이 산에서 도(道)를 깨달았기 때문에 원래 원적산(圓寂山)이었던 산 이름을 천성산(千聖山)이라 고쳐 부르고 나머지 12명 가운데 8명은 동화사로 가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팔공산(八空山)이라고 하며, 나머지 4명은 다시 문경(聞慶)에 있는 대승사(大乘寺)로 가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사불산(四佛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5) 의상

의상(義湘, 서기 625-702년)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에서 제33대 성덕왕 때까지의 스님으로 원효와 더불어 한국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으나 원효와는 너무나 대조적 인물이다. 우선 원효가 평민 출신이었음에 비해서 의상은 고귀한 가문의 태생이었고, 원효에게는 스승도 제자도 없었으나 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을 스승으로 모시고 표훈(表訓)과 진정(眞定) 등 이름 있는 제자들도 많았다.


또한 원효는 일반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하고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치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반해서 의상은 태백산 부석사에 칩거하면서 학문불교의 고결한 삶을 살았으며, 남긴 저서는 짤막한 논설 3편뿐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7언(言) 30구(句) 210자(字)의 짧은 글이지만 방대한 화엄학의 오묘한 진리를 모두 압축하고 있는 아주 귀중한 작품이다.


의상은 그의 나이 37세 때인 문무왕(文武王) 원년(서기 661)에 원효와 함께 두 번째 당 나라 유학 길에 올랐다가 원효는 도중에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발길을 돌리고 혼자 남은 의상은 결연한 의지로 '마음을 깨친 것은 오직 그대뿐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초지일관 학문의 완성을 도모할 것'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짐하면서 홀로 발길을 재촉하여 당 나라로 들어갔다.


당 나라로 들어간 의상은 낙양을 거쳐서 종남산(宗南山) 지상사(至相寺)로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을 찾아갔는데, 지엄은 전날 밤 꿈에 집 앞의 나무 가지가 해동으로 뻗어 있고 가지마다 마니보주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는 아무래도 귀한 손님이 찾아올 징조라고 생각하고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의상이 찾아가자 반갑게 맞아드리고 다른 제자 법장(法藏)과 함께 화엄학을 가르쳐주었다.


의상이 지엄의 문하에서 공부한지도 어느덧 8년이 지난 어느 날 밤 꿈속에 선재동자(善財童子)와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의상을 보고 '이제까지 공부하고 깨달은 바를 글로 남기도록 하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의상은 즉시 스승에게 보고하고 '화엄의 깊고 오묘한 뜻'을 글로 지어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서 불에 태우면서 '이 글이 만약 부처님의 뜻에 맞으면 불에 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아무리 태워도 타지 않고 남는 글자 210자(字)를 거두어 글을 지은 것이 '의상조사 법성게(法性偈)'이고 이를 사각의 도면 위에 옮긴 것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인데, 법(法)자로 시작하여 불(佛)자로 끝나는 이 도인(圖印)은 모두 54개의 각(角)을 돌아가고 있는데, 선재동자가 구법(求法)을 위해서 53명의 선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에 불각(佛覺)을 더하여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이 화엄일승법계도가 의상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기원은 중일전쟁 때 폭격으로 북경 인근에 있는 방산 석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석벽에 화엄경을 새긴 석경(石經)과 함께 '엄법사조(儼法師造)' 즉 '지엄법사가 만들었다'는 문구가 조각된 '화엄일승법계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엄은 그로부터 석 달 후에 입적하였고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3대 조사가 되었으며, 다시 2년 뒤인 서기 670년 그곳에 사신으로 가 있던 재상 김흠순으로부터 당(唐)이 신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다급한 정보를 입수하고 급거 귀국하여 왕에게 보고한 후에 낙산사(洛山寺) 관음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홍련암(紅蓮庵)을 세우고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비롯한 화엄십찰을 세워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부석사에는 창건에 얽힌 설화 한 토막이 전해지고 있는데 [의상이 중국으로 유학 갈 때 도중에 병을 얻어 양주 수위장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유숙하면서 병을 치료하였는데, 그의 딸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의상을 무척 사모하였으나 스님의 꿋꿋한 신심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상이 공부를 마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의상은 당 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급히 귀국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선묘(善妙)는 먼발치에서나마 스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바닷가로 달려갔으나 의상을 태운 배는 이미 부두를 벗어나고 있었다. 실망한 낭자는 바닷가에 있는 벼랑으로 올라가서 발원하기를 '만약 내가 죽어서 용이 될 수만 있다면 스님의 뱃머리를 안전하게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세세생생(世世生生) 스님 곁에서 스님을 뵙고 불법(佛法)을 배우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는 벼랑 밑으로 뛰어내렸다.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한 선묘는 바로 용이 되었고 귀국하는 의상이 탄 뱃머리에서 그를 지켜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으며, 그 뒤 의상이 소백산에 부석사를 세우기 위해서 터를 닦으려고 할 때 이미 그 곳에 먼저 와서 자리잡고 있던 5백여 명의 외도들이 방해를 하여 도저히 일을 할 수 없게되었을 때 선묘룡(善妙龍)이 나타나서 집채만한 거대한 바위를 날려 그들을 좇아내고 무사히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설화에는 무량수전 서쪽 언덕에 있는 부석(浮石)이 바로 그 바위라 전하고 있고 최근에 무량수전 지하부분을 전자파로 탐사하여 분석한 결과 무량수전 앞마당 지하에 길이 13m나 되는 거대한 '용 모양을 한 바위'가 발견되었는데, 이 석룡(石龍)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인공적으로 다듬은 뒤에 흙을 덮고 다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 또한 용이 되었다는 선묘낭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부석사는 화엄사상과 정토사상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사전 치밀한 계획으로 설계하였는데 절 입구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 아홉 단계의 계단을 설치하여 하품하생(下品下生)에서 상품상생(上品上生)까지 극락정토에 오르는 아홉 단계를 표현하고, 무량수전에 봉안된 아미타불상도 서쪽으로 배치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나타내고 있으며, 건물 전체를 화(華)자로 배열하여 이곳이 바로 화엄종찰(華嚴宗刹)임을 가르치고 있다.


6) 원측

원측(圓測)은 제26대 진평왕(眞平王)에서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까지의 덕(德) 높은 스님으로 그는 세 살 때 동진(童眞) 출가하여 15세 때에 당 나라로 들어가서 법을 배웠다. 그가 당 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마침 현장(玄 )이 인도에서 돌아와서 법사(法師) 규기(窺基)를 위해서 유식론(唯識論)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원측은 그곳에 몸을 숨기고 들어가서 남몰래 강의를 듣고 모든 종의(宗儀)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현장이 강의를 끝마칠 무렵이 되자 원측(圓測)은 벌써 서명사(西明寺)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규기(窺基) 보다 한 발 앞서 유식론을 강의하였으며, 뒷날 서명사의 대덕(大德)이 되어 유식론소(唯識論疎)를 저술하였고, 세수 84세에 당 나라의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하였을 때 중국에 있던 그의 제자들이 사리를 모아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부도탑을 세웠다고 한다.


7) 혜초

혜초(慧超, 서기 704-787년)는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의 밀교 스님이다. 그는 16세 때인 서기 719년 당 나라로 건너가서 남인도의 밀교 승려인 금강지(金剛智)로부터 불도를 공부하였고 3년 뒤인 서기 722년 중국 광주를 떠나 해로로 인도까지 건너가서 오천축국(五天竺國) 각지의 많은 성지를 순례한 다음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을 넘고 타클라마칸사막을 거쳐서 서기 727년 다시 당 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장안에 있으면서 10여 년 동안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들은 것을 기행문으로 엮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저술하였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다가 지난 1908년 프랑스 학자 펠리오(Pelliot)가 돈황(敦煌)의 한 석굴에서 그 일부분을 발견하여 프랑스로 가져가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혜초는 중국에서 역경사업에 종사하다가 오대산(五臺山) 보리사(菩提寺)에서 입적하였다.


8) 도의

도의선사(道義禪師)는 제37대 선덕왕에서 제41대 헌덕왕 때의 스님으로서 당 나라에 37년 간 유학하면서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로부터 법을 배워 심인(心印)을 이어받고 헌덕왕 13년(서기 821)에 귀국하여 신라에 남종선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다시 설악산으로 들어가서 진전사(陳田寺)를 창건하고 제자 염거(廉居)와 법손 체징(體澄)을 길렀는데, 체징은 뒷날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산한다.


이 밖에 대구화상(大矩和尙)은 51대 진성여왕 때의 승려로서 왕명에 의해서 위홍(魏弘)과 함께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또한 월명사(月明師)는 경덕왕 때의 승려로서 도솔가(兜率歌)와 죽은 누이를 위해서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었고, 충담사(忠談師)는 경덕왕 때의 스님으로서 안민가(安民歌)를 짓는 등 문학과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스님들도 많다.

 

※ 김유신과 미륵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金庾信, 서기 595-673년) 장군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으로부터 제30대 문무왕 때까지의 인물이다. 그는 가야 김수로왕의 12대 후손이며,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해왕의 증손으로서 아버지 김서현(金舒玄)과 신라 왕족 출신의 딸인 만명(萬明)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이 15세 때에 화랑이 되었고 그 단체를 화랑도(花郞徒) 또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하였는데, 용화(龍華)란 미륵(彌勒)을 가리키는 말이고 향도(香徒)는 향불을 올리는 신도라는 말이다. 따라서 화랑도는 미륵 부처님에게 향(香)을 올리는 신도 또는 미륵부처님을 받드는 신도라는 뜻이다.


그가 17세 때 이웃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침범으로 인해서 국가의 안위가 어려워지자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석굴로 들어가서 목욕 재계하고 하늘을 향해서 삼국통일을 염원하는 고천맹서(告天盟誓)의 기도를 올렸더니 4일째 되던 날 밤 하늘에서 난승(難僧)이라는 노인이 내려와서 김유신에게 칼(劍) 쓰는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었다.


그때 김유신이 기도를 올린 하늘은 도솔천(兜率天)이고 난승(難僧) 노인은 도솔천의 천왕이었다고 하며, 김유신은 그때 배운 신비의 검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는 곧 불교의 무포외정진력(無怖畏精進力)과 미륵부처님의 가피를 입었기 때문에 감히 남들이 따를 수 없는 전공을 세울 수 있었고 실전의 총 지휘자로서 용맹과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 불교유산

 

현존하는 문화재 가운데 대부분이 불교와 관련된 유산이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신라가 패망한지 이미 천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 각각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겪고 일제식민지와 6, 25 전란 시의 엄청난 파괴와 약탈을 당하고도 이토록 많은 유산이 남아있는 것은 신라인이 이룩한 찬란한 불교문화의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경주 일원에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비롯해서 남산과 동남산, 서남산의 계곡에도 절터와 석불, 석탑 등이 즐비하게 남아있으며, 통일신라 때 조성한 성덕대왕신종은 현존하는 세계의 범종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경주 지역 일대를 자연 또는 인위적인 파괴와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유네스코가 채택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값진 유산들이다.


1) 불국사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불국사는 법흥왕 15년(서기 528)에 창건하고 진흥왕 35년(서기 574)에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서 신라 제35대 경덕왕 10년(서기 751)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제36대 혜공왕 10년(서기 774)에 완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김대성은 재상 김문량의 아들로 전생(前生)과 금생(今生)의 부모를 모두 봉양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는 사상적으로 세 가지 기본적인 염원이 응집된 곳으로 그 첫 번째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인데, 대웅전 일각이 여기에 해당되고 경전적인 근거는 법화경(法華經)이다. 그곳에는 다보불(多寶佛)과 석가모니부처님에 얽힌 설화를 바탕으로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을 한 줄로 나란히 세웠는데,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르는 석가탑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절한 설화도 함께 전해 내려오고 있다.


두 번째는 극락세계의 불국토로서 경전적인 근거는 아미타경이며, 연꽃과 칠보로 장엄한 극락전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화엄경(華嚴經)에 근거한 우주의 본체인 법신불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비로전(毘盧殿)을 중심으로 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불국토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다른 사찰이 특정한 교리나 종파적인 특성에 따라서 건립된 것과는 극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또한 불국사 창건에는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비원뿐만 아니라 신라인 전체의 염원이 담긴 곳으로 돌 한 조각 나무 한 토막을 다듬는 데도 모든 정성이 깃들어 있다.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의 다리 난간은 모두 33계단으로 설치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33천(天)을 상징하고 범영루에는 108명의 사람들이 앉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중생들의 번뇌가 모두 108가지라는 것을 상징하여 설계한 것이다.


불국사 역시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서 모두 소실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를 하였으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가 지난 1969년 공사를 시작해서 3년 간의 역사(役事)로 지금과 같이 복원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불국사는 본래의 사찰규모와 비교해서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극치라고 하던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2) 석굴암

석굴암(石窟庵)은 경주 토함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공 석굴로 조성되어 있으며, 석실 안 한가운데에 본존불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고 그 주변으로 문수, 보현, 관음보살을 비롯하여 부처님의 십대제자와 금강역사, 제석(帝釋), 범천(梵天) 등 모두 38위의 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본존불은 성도지 보드가야에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성도상(成道像)과 일치한다.


석굴암의 본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로서 김대성(金大城)이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서 세웠다고 하는데, 조성연대는 불국사와 거의 같은 시기인 경덕왕에서 혜공왕 대에 걸쳐서 건축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석굴은 동지 일출의 방향을 하고 있어 가장 많은 햇빛을 받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석굴의 구조와 불상의 작품성은 종교와 예술과 과학이 낳은 균형과 절제의 모든 아름다움을 갖춘 완벽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 불교전성기에 조성된 석굴암은 신라가 패망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수난을 겪었으며, 특히 조선시대의 불교탄압 정책으로 인해서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어 있다가 1907년 한 우체부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는 굴 입구를 비롯해서 상층부까지 모두 허물어져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나 내부 불상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을 합방한 일제는 1913년 10월 석굴을 보수하면서 석굴 전체를 해체하여 280여 개의 석재를 새로 교체하고 외부를 시멘트 돔으로 둘러쌓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는데 별다른 기초 조사와 전문적 지식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한 공사였기 때문에 자연적인 공기순환의 장치인 통풍구를 막아버리는 졸속한 공사로 인하여 내부구조물에 이끼가 끼는 등 심각한 풍화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963년에는 일제가 설치했던 시멘트 돔 위에 이중으로 시멘트 돔을 설치하고 목조의 전실(前室)을 세워 입구를 두터운 유리로 막아서 바깥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밀폐하여 버렸다. 그러나 공기 유통이 차단된 석굴 안의 습기로 인한 피해는 더욱 심각하게 되었고 궁여지책으로 환풍기를 설치하여 강제통풍을 시키고 있으나 기계장치의 진동과 소음은 또 다른 피해의 원인이 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3) 범종

범종(梵鐘)의 세계적인 으뜸은 두 말할 필요 없이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범종으로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모두 열 한 구인데 그 중에서 국보 제36호인 상원사(上元寺) 종과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 및 실상사(實相寺) 종 등 다섯 구의 범종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으나 나머지 여섯 구는 일본으로 건너가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원래 이름은 봉덕사종이었다. 제33대 성덕대왕이 돌아가시고(서기 737년)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이 등극하여 이듬해에 봉덕사를 준공하였으나 남달리 효심이 깊었던 왕은 봉덕사의 준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규모가 큰 범종을 조성하기로 발원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재위 5년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뒤를 이어 제35대 경덕왕(景德王)이 등극하였다.


경덕왕(서기 742-765년)은 등극하자마자 선왕의 뜻을 받들어 청동 12만근을 들여 범종의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뒤를 이은 제36대 혜공왕(惠恭王)이 등극한지 7년 만인 서기 771년에 그토록 바라던 신종(神鐘)의 완성을 보았는데, 이는 통일신라 전성기 3대 제왕의 손을 거치면서 무려 3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각고 끝에 이루어낸 역작이며 신라인들의 쾌거였다.


'불상(佛像)을 부처님의 몸'이라고 할 때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寺刹)은 부처님의 땅 불국토(佛國土)'이며, '범종의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소리인 법음(法音)이요 원음(圓音)'이다. 경덕왕 10년(서기 751년) 이미 부처님의 몸인 석굴암과 부처님의 땅인 불국사는 완성되었으나 진정한 부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던 신라인들에게 이 신종의 완성은 오랜 염원의 완성이며, 진정한 불국토의 완성이었다.


이밖에 세계적인 범종으로는 오대산 상원사(上元寺)의 범종을 들 수 있는데, 상원사 종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성덕대왕 24년(서기 725년)에 제작되었다. 이 범종은 원래 안동 문루에 있던 것을 조선 초 세조 대왕의 의해서 이곳으로 옮겨놓았는데, 종을 옮기는 도중 일행이 죽령을 넘어갈 때 갑자기 종이 땅에 달라붙어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안동으로 사람을 보내어 문루를 지키던 사람을 찾아 그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원래 이름 있는 종을 옮길 때는 종유(鐘乳) 한 개를 떼 내어 원래 있던 장소에 두고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시키는 데로 종에 달려 있던 유두 한 개를 떼 내어 안동으로 보내고 나서 무사히 옮겨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상원사 종에는 종유 한 개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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