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불교

1. 원삼국의 불교

문선광 2005. 6. 20. 16:50

역대왕조의 불교


1. 원삼국의 불교


고대 삼국의 불교는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함께 혼합되어 도입되었으며, 대승불교 내에서도 여러 개의 종파로 갈라져서 사상적인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재래의 사고방식이나 그릇된 습속과 토착신앙까지도 무조건 배척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드림으로서 기복과 무속신앙의 성격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반면 나라와 지방에 따라서 각기 독특한 불교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다.


또한 전래 초기에는 국가적인 호국신앙과 왕실중심의 귀족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점차 대중화되면서 서민적이고 일반화된 생활불교로 완성되어 국민사상을 선도하고 민족문화를 창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다같이 부처님을 믿고 있는 도반(道伴)이라는 연대의식과 같은 핏줄을 나눈 동족이라는 신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사상과 국가를 통일하는데도 크게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불교가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게되자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역할을 하였는데, 신라의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를 지어 국민교육 자료로 활용하였고 자장율사는 황룡사구층탑의 건립과 같은 거대한 불사를 일으키고 많은 구법승이 중국과 인도로 왕래함으로서 선진문화 수입과 국제교류에 공헌하였으며,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고 사찰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불교미술과 건축술도 크게 발달하였다.


가. 승직 제도


불교가 국가의 공인을 받고 그 교세가 차츰 커감에 따라서 수적으로 늘어나는 승려들을 통제하고 이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행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승직제도(僧職制度)는 신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다른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에서는 승통(僧統) 또는 도유나(都維那)라는 승직이 있었으며, 백제에는 승정(僧正) 또는 승도(僧都)라는 승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는 제24대 진흥왕 11년(서기 550) 고구려에서 들어온 혜량(惠諒)을 국통(國統)에 임명하여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토록 하고 제27대 선덕여왕은 자장(慈藏)을 대국통(大國統)에 임명하여 교단 내의 기강과 규범을 세우고 승단의 운영에 관한 모든 일을 통제하도록 하였으며, 승단 밖에는 대서성(大書省)이라는 승관(僧官)을 두어 국왕의 자문역할을 하면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신라에는 사예(寺隸)라는 신분이 있었는데, 사원에 거주하면서 사찰의 잡무와 스님들의 일을 돕는 일종의 노비로서 남자는 사노(寺奴), 여자는 사비(寺婢)라고 하는 이들의 성분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의 경우는 법흥왕이 흥륜사로 들어갈 때 궁궐에서 데려간 사람들을 사예로 삼아 사찰의 불사를 돕게 한 사람들과 무열왕 때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두 딸을 사예로 보내어 불사를 돕게 한 경우이다.


두 번째 경우는 태종 무열왕 때 역신 모척(毛尺)의 가족들을 모두 몰수하여 사예로 삼은 사람들이다. 첫째의 경우는 처음부터 천한 신분이 아니고 왕족 또는 귀족 출신들이 자기의 뜻에 따라서 사예가 되었기 때문에 일반 노비들과는 성분이 다르고 대우도 좋았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역적의 가족들이 자기의 뜻과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노비가 되었기 때문에 일반 노예와 같이 천한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나. 이름난 스님


1) 고구려


가) 담징
담징(曇徵)은 고구려 제25대 평원왕에서 27대 영류왕 때까지의 스님으로서 제26대 영양왕 21년(서기 610)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오경(五經)과 채화(彩畵), 공예(工藝) 등을 전하고 먹과 맷돌의 제작법을 가르쳤으며, 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려주었는데, 이 벽화는 중국의 운강석불(雲剛石佛),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더불어 동양의 삼대미술품 중의 하나였으나 1948년 화재로 인해서 아깝게도 소실되어 버렸다.


나) 혜관
혜관(惠灌)은 고구려 27대 영류왕 때의 스님으로 중국 수 나라에서 삼론종(三論宗)의 종지를 배우고 귀국하였다가 영류왕 7년(서기 6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원흥사(元興寺, 겡코사)에 머무를 때 일본 최고의 승직인 승정(僧正)이 되었으며, 다시 정상사( 上寺, 쇼죠사)를 창건하고 삼론종을 전하여 일본 삼론종의 시조로 추앙 받고 있는 분이다.


다) 보덕
보덕(普德)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 때의 스님으로서 평양 서쪽 대보산에 영탑사(靈塔寺)를 세우고 연복사(延福寺)에도 머물러 있다가 보장왕이 당 나라에서 도교를 도입하여 이를 장려하자 백제로 내려가서 완산(完山, 지금 전주)에 경복사(景福寺)를 세우고 열반종(涅槃宗)을 강론하였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신라에서 스님의 제자 11명이 각각 따로 절을 세우고 포교하여 신라 열반종의 개조가 되었다.


2) 백제


가) 겸익
겸익(謙益)은 백제 제26대 성왕 4년(서기 526)에 인도로 건너가서 중인도의 상가나에 있는 대율사(大律寺)에서 범어를 익히고 불교의 교리를 연구한 다음 귀국하면서 인도스님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범어로 된 율장(律藏)을 가지고 와서 28명의 다른 스님들과 함께 율부(律賦) 72권을 번역하여 예의와 의식을 중시하는 백제불교의 특징을 세웠다.


나) 관륵
관륵(觀勒)은 백제 제30대 무왕 3년(서기 602)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원흥사(元興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불교와 역학, 천문과 지리, 둔갑방술 등의 책을 전하고 이를 가르쳤으며, 한 스님이 자기의 조부를 살해하여 다른 많은 스님들까지 잡혀서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 왕에게 고하여 그들을 풀어주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일본 조정에서는 그를 승정(僧正)에 임명하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 잡도록 하였다.


3) 신라


가) 각덕
각덕(覺德)은 신라 최초의 구법승으로 제24대 진흥왕 원년(서기 540)에 중국 양(梁) 나라로 유학하였다가 10년만에 양(梁) 나라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들어 왔는데, 진흥왕은 백관들을 거느리고 친히 흥륜사(興輪寺)까지 나가서 이들을 영접하였는데, 이때 각덕이 가져온 사리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이다.


나) 원광
원광(圓光)은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의 스님으로 불교학은 물론 유학(儒學)과 노(老)·장(莊)학 등 내외전에 두루 박식하였다. 그는 진한 사람으로 59세 때인 진평왕 11년(서기 589)에 진(陳) 나라에 유학하여 경(經)·율(律)·론(論) 삼장을 연구하고 다시 수 나라로 가서 혜원(慧遠)으로부터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열반경(涅槃經)을 배우고 진평왕 22년(서기 600)에 귀국하였다.


스님은 귀국 후 국사(國師)로 중용되어 국정과 교육 및 불교학 연구에 전력하였으며, 고구려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신라를 괴롭히자 이것을 징벌하기 위해서 수(隨) 나라에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하고 점찰보(占察寶)를 설치하여 불사기금을 마련하였으며, 백좌강회(百座講會)를 열어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하고 세속오계를 제정하여 일반국민들과 화랑도들을 가르쳤다.


원광(圓光)이 가르친 세속오계는 충(事君以忠)·효(事親以孝)·신(交友以信) 용(臨戰無退)·인(殺生有擇)의 다섯 가지로 유교적인 덕목과 궤(軌)를 같이하는 이 가르침은 큰 거부감 없이 일반국민 모두에게 그대로 수용되어 신라인의 삶의 방식과 젊은이들의 교육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마지막 인(仁)의 '살생유택'은 불살생(不殺生)을 강조하는 불교의 사상체계에서 보면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이다.


그러나 삼국으로 분단되어 매일 같이 전쟁이 생활화되고 있던 당시의 입장에서 볼 때 어쩔 수 없이 세속인들이 지켜야할 최선의 계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부득이 살생을 하는 경우에도 다음 네 가지는 반드시 지키도록 했는데, 첫째 매월 8, 14, 15, 23, 29, 30일의 6재일(齋日)은 사천왕이 사람의 선악을 살피고 악귀가 사람을 엿보는 날이므로 살생을 금하고 몸을 깨끗이 하면서 계(戒)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둘째 살아 있는 것들이 생식을 하는 봄철과 여름철에는 살생을 피하라고 해서 번식의 의지를 잘라버리지 못하도록 하고, 셋째는 말·소·개·닭 등 기동력을 제공하거나 농사를 짓고 집을 지키며 시간을 알려주는 가축의 살생을 금지하였으며, 넷째는 작은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작은 미물을 죽이고 커다란 살생의 업을 짓거나 자라나는 생명의 싹을 자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라)자장
자장(慈藏)은 그의 생몰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다만 신라 제27대 선덕여왕과 제28대 진덕여왕 때의 스님으로 그의 어머니가 분황사 천수대비(千手大悲)에게 기도하여 태어났다는 진골 출신의 승려이다. 그는 선덕여왕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서 관직에 나오라는 명을 받고도 모두 거절하였으며, 나중에는 재상(宰相)의 자리까지 권유받고도 끝까지 받아드리지 않고 출가를 결행하였던 인물이다.


자장이 왕명을 거역하면서 계속 출가를 고집하자 선덕여왕은 사자를 보내면서 또 명령을 어기거든 즉시 처형하라고 하였는데, 사자가 찾아갔을 때 자장은 '오녕일일지계이사(吾寧一日持戒而死) 불원백년파계이생(不願百年破戒而生)' 즉 '나는 하루라도 계(戒)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사자로부터 보고를 받은 왕은 자장의 기개에 감동하여 출가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국왕으로부터 출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자장은 즉시 자신의 집을 고쳐 원녕사(元寧寺)라는 절을 지어 정원에는 선재동자가 찾아가는 53명의 선지식을 상징하는 쉰 세 그루의 나무를 심고 모진 고행과 함께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는데, 고골관이란 썩어 가는 시신을 눈앞에 두고 그 시신이 부패하면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응시하면서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공부 방법이다.


자장(慈藏)이 당(唐) 나라 유학 길에 오른 것은 선덕여왕 5년(서기 636년)으로 그의 제자 실(實) 등 10여명과 함께 청량산(淸凉山, 五臺山)으로 들어가서 수학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범어로 된 게송을 얻고 '뒷날 신라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는데, 이 소식을 듣고 수계를 받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들을 피하여 다시 입산하여 운제사(雲際寺) 동쪽 바위 밑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였다.


자장이 당 나라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冶城)이 함락되자 선덕여왕은 자장에게 빨리 귀국하라는 소환령을 내렸으며, 왕명을 받은 자장이 귀국하면서(서기 643년) 대장경과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지고 와서 경남 양산 통도사를 비롯한 전국 여러 곳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고 모여드는 신도들에게 처음으로 수계(授戒)를 하였다.


그 후 자장은 승직(僧職)의 최고 직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보름마다 법회를 열고 계를 설하여 신라 계율종(戒律宗)의 시조가 되었으며, 만년에 국통의 자리를 은퇴하고 지금의 정암사(淨巖寺) 자리인 갈래사(葛來寺) 절터 인근에 초막을 짓고 문수보살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루한 옷차림을 한 거사가 찾아와서 시자(侍者)에게 자장을 만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거사의 말투가 너무나 거칠고 불손하여 시자가 자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더니 자장은 '아마 미친 사람이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사를 만나지 않았는데, 자장의 이런 태도를 본 거사가 '아서라 아상(我相)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랴'고 하면서 등에 메고 있던 삼태기를 엎으니 금강보좌가 나타나고 거사는 그 보좌 위에 앉은 체 한 줄기 빛을 남기고 서쪽으로 날아가 버리었다.


아차 하고 놀란 자장이 얼른 가사장삼을 갖추어 입고 황급하게 거사의 뒤를 따라 갔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대부분 수행이 깊은 스님들은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담담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 비해서 당대의 이름 높은 스님으로서 격에 맞지 않게 '아상(我相)이 남아있다'는 뼈아픈 말을 듣고 참담한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무척 아쉬움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