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름난 성지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찰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찰들은 저마다
독특한 전통과 특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지 아닌 곳이 거의 없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성지라고 하는 것은 그 사찰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전통과 유적 또는 유물 등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성지로 알려져서 수많은 참배 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을 말한다.
1. 삼보사찰
불(佛)·법(法)·승(僧) 삼보를 대표하는 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안치하고 있는 영축산 통도사를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고 하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가야산 해인사를 법보사찰(法寶寺刹)이라 하며, 고려시대의 이름난 스님인 보조국사 지눌에 이어 16국사(國師)를 배출한 조계산 송광사를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1) 불보종찰 통도사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 즉 '부처님의 으뜸가는 집이요 나라의 큰절'이라는 영축산 통도사는 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서 자장이 당 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그보다 훨씬 앞서 진흥왕 10년(서기 549)에 각덕스님이 가지고 왔던 부처님의 진신사리 중 일부를 봉안하여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2년(서기 643) 자장율사에 의해서 창건된 사찰이다.
통도사(通度寺)라는 절 이름은 '통제만법(通諸萬法) 도제중생(度濟衆生)' 즉 '만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하라'는 말의 머릿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처음 그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였을 때 연못 속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어서 자장(慈藏)이 신통력으로 여덟 마리를
승천시켰으나 한 마리는 굳이 남아서 절을 지키겠다고 하여 부득이 연못의 일부를 그대로 두었는데, 구룡지(九龍池)가 바로 그곳이다.
자장이 구룡지를 메운 후 절을 짓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세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계법(戒法)을 전하였더니 사방에서
신도들이 몰려들어 사세가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사리 때문에 수난을 당하기도 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조정의 관리들이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서
사리함을 열려고 하다가 큰 구렁이와 거북이가 석함을 지키고 있어 실패하자 군사까지 동원해서 강제로 열다가 사리함이 손상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금강계단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왜병들이 훔쳐갔던 것을 전쟁이
끝난 후에 사명(四溟)대사가 일왕 도쿠가와이에야스와 담판하여 다시 찾아왔으며, 그중 일부는 다른 사찰에 분산하여 봉안하였는데, 강원도 고성군
민통선 안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에 봉안되어 있는 부처님의 치아사리(齒牙舍利)도 사명대사가 찾아온 진신사리 중의 일부라고 한다.
사찰에 전해지고 있는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각덕(覺德)이 가지고 온 사리와 자장(慈藏)이 가지고 온 백과의 사리를 3등분하여
황룡사와 대화사, 통도사에 각각 봉안하였는데, 앞의 두 사찰에 봉안했던 사리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통도사 사리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묘향산 보현사에 봉안되어 있는 북한 유일의 부처님사리도 통도사에 봉안하고 있던 것이라고 한다.
2) 법보종찰 해인사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의상대사의 법손(法孫)인 순응(順應)과 그의 제자 이정(利貞) 두 스님이 창건한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보다 백여 년 앞서 당 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고 뒤이어서 해인사와 화엄사, 범어사 등 화엄십찰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인사 창건의 참 뜻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에서 비롯되는데, 이 세상을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가 사라지면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있는 그대로 물(海) 속에 비치는(印) 것'과 같이 탐진치로 오염된 중생들의 마음도
각자 마음속의 파도인 '번뇌망상'만 사라지게 되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본래의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엄종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봉안함으로서 법보종찰로서 명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데, 이 팔만대장경은 본래 강화도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선원사로 옮겼다가 조선 태조 7년(서기 1398)에 군사 2천명을 동원해서 서울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데, 국보 제32호 경판과 국보 제52호 장경각을 위시하여 해인사 일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로 이동 보관하게 된 까닭은 가야산은 원래부터 삼재가 들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의 명소로 택리지에도 이곳을 명승의
고장으로 열거하고 있으며, 화엄종찰로서 교종(敎宗)의 뿌리가 깊이 내려져 있고 교통이 불편하여 외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리적인 여건
등으로 인해서 귀중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장소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대장경이 보관된 국보 제52호 장경각은 똑 같은 양식과 같은 규모로 지은 60간 165평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남쪽의 건물이 수다라장(修多羅藏)이고 북쪽 건물이 법보전(法寶殿)이다. 이 건물은 창고기능을 위해서 일체의 장식을 하지 않고 주변환경과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 자연 통풍방식과 방습을 위한 내부구조는 극히 소박하면서도 전통과학의 우수성이 극도로 발휘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 태조 때 지어진 뒤 성종 20년(서기 1488)에 모후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시주에 의해서 일부 개축한 사실이 있을
뿐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일곱 차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건축 후 6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기둥 하나
기울어지지 않고 내부에 보관된 경판도 습기와 해충에 의한 사소한 피해도 없이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는 신비의 건축물이다.
그러나 해인사가 위기를 맞은 것은 화재를 재외하고도 여러 차례나 있었다. 임진왜란(서기 1592년) 때는 그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던 대장경을 강탈하기 위해서 왜병들이 해인사로 몰려들었으나 현풍의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거창의 송암 김면(金沔) 장군과 합천의 정인홍
장군이 이끄는 의병과 소암(昭岩)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저항으로 이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또한 6, 25 전쟁 때는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인민군들이 퇴각하면서 패잔병 수백 명이 해인사 일대에 숨어서 저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소탕하던 육군의 공중폭격지원 요청에 의해서 우리 공군 전폭기 4대가 폭탄을 싣고 출격하였는데, 사찰 안에 숨어있는 인민군의 소재를
파악한 미군정찰기에서 대적광전 앞마당에 연막탄을 투하하면서 해인사를 즉각 폭격하라는 미군사 고문단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미군의 작전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려는 바로 그 순간 편대장의 머리에 이곳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 떠올랐고
즉시 폭격중지명령을 내렸다. 미군 정찰기에서는 폭격을 재촉하는 명령이 계속 이어지고 문책을 걱정하는 대원들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편대장은 '일체
공격을 중지하고 내 뒤를 따르라'는 명령과 함께 기수를 돌려 절에서 떨어진 곳에 몰려있던 인민군을 공격하고 그대로 귀환하였다.
바로 그 날 미군사고문단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작전명령 불복종에 대한 강한 항의를 하였고 대통령은 크게 분노를 터뜨렸는데, 그
자리에 배석하고 있던 공군참모총장이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강하게 역설함으로서 명령불복종 사건을 겨우 무마하였는데, 미군사고문단의
작전명령에 맞서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안전하게 보호하였던 편대장은 당시 공군참모총장의 친동생이었다고 한다.
전시의 명령불복종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뒷날 강릉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팔만대장경은 7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숱한 고난과 재난을 겪으면서 목숨을 걸고 지켜왔기 때문에 더욱 값진
문화유산이 되고 있으며, 그래서 장경각 위로는 새 한 마리 날아 넘지 않고 쥐 한 마리도 들락거리지 않는 신비한 곳이 되고 있다.
그러나 경판이 목재로 되어 있어 언젠가는 수명이 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만년 이상 보존 가능한 인청(燐靑)동판으로 복원하기 위하여
2003년 11월 17일 고불식을 올리고 해인사 단독으로 불사를 추진하였으나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의 국보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지난(2005년) 6월 27일 각계 원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팔만대장경동판간행범국민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범국민적 사업으로
추진키로 하였다.
동판간행사업에 신청자격은 개인 또는 법인 누구나 가능하고, 금액은 1계좌에 100만원 이상이다. 제작되는 동판의 구성은 3매 1조로
하여 해인사 봉안용 1매와 북한 기증용 1매, 개인 소장용 1매로 구성된다. 다만 개인 소장용은 팔만대장경 내용 중의 일부인 '반야심경'으로
구성돼 동판 간행일정에 맞추어 신청자에게 개별적으로 발송된다고 한다.
3) 승보사찰 송광사
전남 승주 조계산 송광사(松廣寺)는 신라 말에 혜린(慧璘)선사가 창건하여 길상사(吉祥寺)라 하였고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위해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대대적인 중창과 함께 사찰 이름을 수선사(修禪寺)라 하였다가 뒤에 다시 송광사로 고쳤는데, 이 절을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 하는 까닭은 보조국사 지눌 이후 모두 열 여섯 분의 국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국사란 원래 한 나라의 사표가 되는 고승들에게 국왕이 직접 내리는 칭호인데 이곳 송광사에는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지눌(知訥) 이후로
진각, 혜심(慧諶)과, 청진, 진명, 원오 등 모두 15명의 국사가 배출되었고 국사 제도가 없어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 공덕과 법력이 국사와
같다고 하여 종문에서 인정한 고봉화상을 합해서 모두 16명이다.
2.오대총림
총림(叢林)이란 범어 빈디야바나(Vindhyavana, 貧陀婆那)를 번역한 말로서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해서 이르는 말이다.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선원(禪院)과 강원(講院), 율원(律院), 염불원(念佛院) 등의 시설과 조직 기구를 모두 갖추어야 하는데, 이들 총림 중에서 특히 참선을 주로 하는 선찰을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원이란 참선수행을 주로 하는 곳으로 부처님 당시의 우안거(雨安居)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안거(varsika)란
varsa 즉 비(雨)를 말하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음력 4月 15日부터 7月 15日까지 3개월 동안은 거센 비바람 때문에 밖으로 나돌아다니기에
힘이 드는 것은 물론 외출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짐승이나 벌레들을 밟아 죽일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앉아 좌선수행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안거제도는 부처님 이전부터 바라문교에서 행하여지던 것을 불교에서 도입하여 수행의 성과와 법랍(法臘)의 위계를 정하는 기초로
삼았는데, 첫 번째의 하안거(夏安居, 雨安居)를 마치면 입중(入衆)이라 하고 다섯 번 이상의 안거를 마치면 사리( 利)라 하며, 열 번 이상의
하안거를 마친 분들을 화상(和尙)이라 하여 수행의 연륜이 높은 분들을 존경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하안거 외에도 음력 10월 15일에 결재해서 그 이듬해 음력 정월 15일에 해재하는 동안거(冬安居,
雪安居)도 행하여지고 있으며, 이 두 차례의 안거수행이 끝나는 날에는 동료 스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안거기간 동안에 지은 죄과가 있으면
스스로 대중들에게 고백하고 참회하는 행사도 하는데 그것을 자자(自恣)라고 한다.
그리고 하안거 해재일인 음력 7월 15일은 우란분절(盂蘭忿節)이라고 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천도하고 효심을 일깨우는 행사도 함께
봉행하는데, 이 행사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의 한 분인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가 자신의 신통력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옥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에게 부탁해서 안거를 마친 모든 수행자들이 힘을 합쳐 천도시킨 것이 그 유래가 되고 있다.
강원은 승가의 작은 승가로서 불법(佛法)의 쇠퇴를 막고 정법(正法)을 구현시키기 위하여 예불, 강의와 문답, 간경(看經)과
논강(論講) 등을 통해서 불교의 전반적인 틀을 세우는 곳으로 일반 학교와는 달리 실천적 수행이 필수적이다. 또한 보름마다 실시하는 포살을 통해서
계율을 지키고 대중을 화합하게 하며, 공부와 생활을 일치시킴으로서 지식(知識)을 지혜(智慧)로 전환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율원(律院)은 부처님의 지고 지순한 행인 계율(戒律)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연구하며 학습하는 전문교육기관으로서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혜명(慧命)을 이어가는 곳이며, 염불원(念佛院)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암송(暗誦) 또는 독송(讀誦)하거나 부처님이나
보살의 명호(名號)를 정근하는 염불수행을 전문적으로 전수하는 곳이다.
이상과 같은 체제가 두루 갖추어진 우리나라의 5대 총림은 해인총림 해인사(海印寺)를 비롯해서 영축총림 통도사(通度寺)와 조계총림
송광사(松廣寺), 그리고 고불총림 백양사(白羊寺)와 덕숭총림 수덕사(修德寺) 등 모두 다섯 곳이다. 일반 사찰의 최고 어른을
조실(祖室)스님이라고 하는데 반해서 총림의 최고 어른은 방장(方丈)스님이라고 부른다.
1) 해인총림 해인사
가야산은 일명 우두산(牛頭山)이라고도 불리는 해동제일의 명산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룬 성도지 붓다가야(Buddha-kaya)의 가야에서 따온 이름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스님에 의해서 창건된 해인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도움으로 크게 불사를 일으켰으며, 조선 성종 21년(서기 1490)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의 도움으로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선 숙종 21년(서기 1695)의 화재 이후 고종 8년(서기 1871)까지 176년 동안에 무려 일곱 차례의 크고 작은
화재를 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장경각을 비롯한 팔만대장경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의 큰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순조 18년(서기 1818)에 세워진 건물로 최근(서기 1971)에 지붕을 비롯해서 벽화, 단청 등을 대폭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인사가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이 된 것은 1967년 조계종사찰 중에서 제일 먼저 총림이 되면서부터이다. '속불혜명(續佛慧命)
전법도생(傳法度生)'의 이념아래 출가수행자로 하여금 전미개오(轉迷開悟)하고 보살도를 실천하여 불국토의 실현에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교육목표로 1955년에 문을 연 법보전문강원은 1987년 승가대학으로 승격되어 지금까지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총림은 원래 강원과 선원, 율원 등을 두루 갖추어야 하지만 해인사는 선원이 그 중심이 되고 있는데, 퇴설당(堆雪堂)과
선열당(禪悅堂), 조사전(祖師殿)을 선원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동쪽 숲 속의 소림원(少林院)을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고 삼선암(三仙庵)과
약수암(藥水庵), 보현암(普賢庵)은 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이고 원당암(願堂庵)과 용탑선원(龍塔禪院)은 재가불자들의 선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율원(律院)은 조계종 종단의 기본교육과정을 이수한 비구스님으로 하여금 율장(律藏)을 전문적으로 연구케 하여 청정(淸淨),
지계(持戒)의 기풍을 확립하고 지덕을 겸비한 율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해인사에서 1977년 한국불교 최초로 1년 교육과정의 율원을
개원하였고 1999년에 다시 2년 교육과정의 전문 교육기관으로 개편해서 운영중이다.
2) 영축총림 통도사
영축산(靈鷲山)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법화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을 설법하신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있는 영취산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독수리가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고 해서 취서산(鷲棲山)이라고도 한다. 통도사는 국내에 백여 개소의 말사와 해외에 십여 개소의 포교당을 관장하는 대 본산으로 선원(禪院)과 강원(講院) 및 율원(律院)을 모두 갖추어 1969년 총림이 된 사찰이다.
3) 조계총림 송광사
송광사(松廣寺)라는 절 이름에 대하여 몇 가지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송(松)의 글자를 풀면 十八公이 되고 광(廣)은 널리 편다는 뜻으로 이를 풀이하여 '열 여덟 분의 큰스님이 나와서 불법을 크게 떨칠 절'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지눌스님이 절터를 닦을 때 나무로 깎은 솔개 날렸더니 국사전 뒷등에 앉아서 '솔갱이 절'이라고 한 말이 변한 것이라는 설과 산에 소나무가 많아서 송광사라 했다는 설이 있다.
송광사는 신라 말에 혜린(慧璘)선사가 창건 길상사(吉祥寺)라 하였고 고려 때 지눌스님이 정혜결사를 위하여 9년 동안 이 곳에 머물러
있을 때 대대적인 불사를 하고 수선사(修禪寺)로 고쳤다가 다시 조계산 송광사로 바꾸었다. 그 후 수 차례의 재난과 6·25 동란으로 인해서
폐허가 되었으나 1969년 총림으로 승격 된 이후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 동안 계속된 불사로 지금과 같은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4) 덕숭총림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修德寺)는 충남 예산 덕숭산에 소재하고 있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서 백제 위덕왕(서기 554-569년) 때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통일신라 때 원효대사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그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구한말 경허(鏡虛)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으며, 만공(滿空) 스님이 이 절을 중창한 이후 선찰로서 크게 번창하였다.
고려 제25대 충렬왕 34년(서기 1308)에 건축된 이 절의 대웅전은 건축연도가 분명하게 밝혀진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고 관음보살의 화신이 수덕각시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절을 세운 후에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담긴 관음바위와 고승대덕이
수도 정진하던 정혜사(定慧寺) 능인(能仁)선원을 위시해서 만공스님이 자연암벽을 다듬어 세운 높이 25척의 거대한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그리고 절의 서쪽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견성암(見性庵)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수도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의 환희대(歡喜臺)도 비구니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다. 수덕사는 원래 마곡사의 말사였으나 1962년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하였고, 근대 선풍을 진작시킨 선지종찰(禪之宗刹)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아 1984년에 총림이 된 사찰이다.
5) 고불총림 백양사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白羊寺)는 전남 장성군 백양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조계종 제18교구 본사로서 종정 큰스님 다섯 분이 배출된 이름난 사찰이다. 그러나 이 절의 창건연대와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신라 때 어떤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지어 백암사라 하였다는 설과 백제 무왕 33년(서기 632)에 신라의 스님인 여환(如幻)선사가 절을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백암사는 고려 덕종 3년(서기 1034)에 중연(中延)선사가 정토(淨土)법문을 선양하기 위해서 정토사(淨土寺)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후 다시 백암사에서 정토사로 이름이 변경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지금의 백양사로 정착된 것은 조선 선조 8년(서기 1574) 이
절의 주지로 있던 팔원(八元)선사가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백양사로 고치고 자신의 법명을 환양(喚羊)이라 고친 이후부터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님은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였는데 그때마다 백학봉 밑에 사는 백양 한 마리가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독경소리를
듣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꿈에 그 백양이 스님의 독경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축생의 몸을 벗고 사람으로 환생한다고 하면서 절을 하고
물러갔는데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이 뒷산을 산책하다가 백양의 시체를 발견하고 절 이름과 함께 자기의 법명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양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구한말 이후 환응(幻應)과 만암(曼庵) 두 스님에 의해서 대작불사가 이루어진
이후이며, 특히 만암종헌선사가 이 절의 주지로 부임한 1916년에서 1927년까지 10년여의 불사에 의해서 대찰의 모습을 갖추었고, 1947년
주변 20여 사찰이 함께 참여하여 고불총림을 이루었으나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96년 다시 총림이 되었다.
'불교의 성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약사, 지장, 나한의 성지(갓바위, 거조암, 사리암) (0) | 2005.09.17 |
---|---|
5. 영험있는 관음, 나한기도처(향일암, 오세암, 무위사, 관음사) (0) | 2005.09.15 |
4. 3대 관음성지(강화보문사, 낙산사홍련암, 남해보리암) (0) | 2005.09.14 |
3. 오대 적멸보궁(통도사, 봉정암, 상원사, 법흥사, 정암사) (0) | 2005.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