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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판단이 흐려질 만큼 사랑에 눈먼 남녀사이라면 눈에 낀 콩깍지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에서,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보는 사람들마다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하거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 꽤나 많습니다. 보고 또 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할 만큼 정교하거나 기묘해 인간의 손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러한 사실들이 현물이 되어 눈앞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가늠할 수없는 장인정신에 탄복을 하며 인간들의 창조력과 손끝이 구사할 수 있는 그 기교와 정교함의 끝이 어디일까를 가늠하느라 두 눈만 껌벅이며 번번이 눈뜬장님이 됩니다.
학교를 다닐 때 손재주 좋은 친구들이 이따금 지우개나 나무토막을 이용해 도장을 파는 경우가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 있어 도장을 판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기술이었습니다. 나무에 이름 석 자를 거꾸로 새기는 도장파기도 이렇듯 쉬운 일이 아닌데 옛날에는 책을 만들기 위해 목판에 빼곡하게 뒤집어진 글을 양각하였으니 그 정성과 섬세한 능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국보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글자 하나하나를 새긴 장인들의 정성이 역사적 가치에 못지않다는 생각입니다. 부드럽게 써지는 연필을 가지고도 복잡한 한문을 반듯하게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딱딱한 목판에, 그것도 글자가 뒤집어진 상태로 양각을 해야 하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웬만한 규모의 절에는 지장전이나 명부전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전각들이 있습니다.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니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지만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어둠의 세계, 염라국의 십왕상이 모셔진 곳이기에 명부전(冥府殿)이라고도 하는 곳입니다. 화려한 원색의 연등이 달려있는 여느 법당의 천장과는 달리 지장전의 천장에는 소복처럼 하얀색의 영가등이 달려 있습니다. 육환장을 들고 삭발을 한 지장보살상이 가운데 모셔져 있고 좌우로 염라국의 십왕상과 판관이나 사자상 등이 도열해 있는 경우도 보일 겁니다. 지장보살님이란 어떤 분? 지장전에 모셔진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이 없어질 때까지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불보살입니다. 사바세계의 삶을 살면서 쌓은 업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 부지기수의 중생들이 받는 그 고통과 애처로움을 차마 어쩌지 못해, 그들 모두를 구제하겠다고 지옥 문턱에서 구원과 자비의 보살행을 실천하고 계신 보살님이라고 합니다.
마음씨 고운 딸은, 생전에 지은 죄가 태산 같은 어머니가 저승 지옥에 떨어져 받을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겪을 고통을 덜어주고, 그 고통의 세계로부터 어머니가 벗어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자비 행을 실천했습니다. 굶주리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다 보니 이제 그녀는 거지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에게 베푸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결국 알몸이 되었습니다. 알몸이 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흙을 발라 알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그런 지옥에서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는 중생들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죄과로 인해 고통 받는 육도 중생들을 모두 해탈케 한 연후에야 성불하겠노라"는 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바야흐로 “지옥 중생을 다 구제하리라는 지장보살의 대원”이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그를 가리켜 '대원본존지장보살(大願本尊地藏菩薩)'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중생에 대한 철저한 연민과 대자비행은 지장보살의 외형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상으로 등장하는 불보살들은 화려한 의상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휘황찬란한 장식물로 칠보단장을 하였지만, 지장보살만은 그냥 삭발한 상태거나 수건을 쓴 정도의 비구니 모습입니다. 구원자의 모습이 화려하면 그 화려함에서 위엄과 안도감은 생길지 모르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장보살상은 중생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머리를 삭발하고 남루한 가사를 입은 모습으로 계신다고 합니다. 이렇듯 세세한 부분까지 헤아리는 지장보살님이기에 오늘도 화려하지 않은 비구니 모습으로, 석장으로 지옥문을 두드리며 지옥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기도하고 계실 분입니다. 지장보살은 현세불인 석가부처님 입멸 후부터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56억여 년 동안 오타악세 중생을 구원하도록 석가모니불로부터 위임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 때 지장은 "세존이시여! 오직 바라옵건대, 후세의 악업 중생에 대해서는 염려 마옵소서"하며 다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장보살은 부처님 부재 시 말법세계의 중생을 구원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모든 장소에 현신하여 육도 윤회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하고 계신 불보살입니다. 딱 300권만을 찍어낸 목판 인쇄, 지장보살본원경 이와 같이 지장보살에 대한 전부를 담고 있는 ‘지장보살본원경’이 목판에 서각되어 딱 300부만 찍어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목판 지장경이 출판되기까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예리한 칼날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 자 한 자를 새겨나갔을 장인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아무리 숙련된 손놀림이라고 하지만 그 예리한 칼끝에 손끝을 찔린 적도 있을 겁니다. 그 숙련된 손놀림을 얻기까지 몇 번이나 칼끝에 손을 베이거나 찔렸을까는 어림조차 되지 않습니다. 조각칼을 움켜쥔 손가락에 맺힌 굳은살도 몇 번씩 정도는 뜯어내고 새로 잡히는 과정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세상의 만상에 눈감고 만상의 소리에 귀 닫은 채 칼끝에만 집중해 경문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니 오감과 정성의 형체가 뒤집어진 글자로 하나하나 돋아납니다. 가끔은 흐릿해지기조차 하는 시선을 집중시키고, 고랑이라도 이룰 듯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땀줄기 훔쳐가며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돋아냅니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철에도 돋아나는 새싹처럼 경문을 돋아 올렸고, 녹음 무성한 한여름에도 주르르 흐르는 땀방울을 쌓아 경문으로 돋우었을 겁니다. 티끌처럼 새겨온 경문들이 반 년쯤의 세월동안 쌓이니 몇 장의 목판정도는 완성되었을 겁니다. 산천계곡이 알록달록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을에도, 삼라만상이 움직임을 멈추는 한겨울에도 장인의 칼끝은 멈추지 않으니 어느덧 30장, 양면으로 경문이 빼곡하게 서각된 경판이 완성되었습니다.
먹물을 바른 목판에 올린 한지를 성의 없이 문지르다가는 자칫 먹물 먹은 한지가 찢어질 수 있으니 무아지경의 심신으로 바람에 구름 가듯, 바람결에 장삼자락 너울대듯 조심조심하며 한장 한장을 박아내야만 했을 겁니다. 이렇게 정성의 들숨을 들이마시고 인고의 날숨을 내쉬며 찍어내고 묶어내는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낱장의 경문들을 차례대로 합본하고 엮어주니 두툼한 경문 한 권이 되었습니다. 이런 경문은 더도 덜도 아닌 딱 300권만 제작되어 보시자들의 서원문이 더해져 지장전에 봉안되었습니다. 두들기기만 하면 글자들이 두르르 쏟아지는 컴퓨터인쇄기도 있고, 이미 만들어진 활자들도 많지만 굳이 살점을 오려내듯 한자 한자 목판 서각을 한 것은 심신이야말로 정성과 땀방울로만 그려낼 수밖에 없는 감탄과 탄복의 결정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경판 하나, 글자 한자를 이리보고 저리 보며 그 정교함과 깔끔함에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두 눈만을 멀뚱거리며 감탄하고 찬탄할 뿐입니다. 입 또한 헤벌쭉 벌린 그런 상태가 분명합니다. 돈벌이의 안목으로 본다면 허송세월에 우매하기 그지없는 목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경판에 스며든 정성과 땀방울이 진가를 더해 가면 그 자체가 보물이며 가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보는 이가 두 눈만을 멀뚱거리게 믿기지 않는 또 하나의 심오한 대상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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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인사수련동문회
글쓴이 : 안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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