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탄생과 전래

2. 불교의 전래

문선광 2005. 6. 20. 01:28

2. 불교의 전래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석가모니부처님에 의해서 탄생된 불교가 인도의 국경을 넘어 본격적으로 해외전파에 나선 것은 기원전 3세기경으로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쇼카(Ashoka)대왕 때의 일이다. 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200여 년이 지난 뒤에 등극하여 전(全) 인도 대륙을 하나로 통일한 제왕으로 오늘날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전설적인 호불의 군주였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침공한 직후인 기원전 317년경 마가다(Magadha)국에서 일어났던 찬드라쿱타는 먼저 외세의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갠지스강 유역과 서북인도 지방의 여러 나라를 차례로 평정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빈두사라왕과 기원 전 268년에 즉위한 손자 아쇼카대왕에 의해서 사상 최초로 전 인도대륙을 장악한 전대미문의 통일제국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정복전쟁으로 인해서 전쟁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것은 물론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반국민들과 무수한 가축들까지 살상하였던 일은 언제나 아쇼카대왕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고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번민과 회의를 가지게 하였다. 그는 참다운 정치란 국민들에게 진 빚을 갚는 행위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에 귀의하여 열렬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아쇼카왕은 먼저 무고하게 희생된 생명들에 대한 참회와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민생을 배려하기 위하여 자비의 정치와 정법(正法)의 정치를 실현하면서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나라 안 여러 곳에 석주를 세우고 변경지방의 암벽에는 조칙을 적은 비문을 새겼는데, 이것이 유명한 '마애(磨崖) 14장의 법칙'이라고 하는 아쇼카대왕의 석주(石柱)와 비문(碑文)으로 그 중 20여 곳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아쇼카대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는 출가하여 덕(德)이 높은 스님이 되어 스리랑카로 불교를 전한 주인공이다. 이것이 불교 최초의 해외전파로서 그 루트는 미얀마→캄보디아→태국→자바→베트남으로 전해져서 남방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데, 대승불교 계통에서는 이들을 소승불교라 하여 비하하고 있으나 그들은 스스로를 장로불교 또는 정통불교라 주장하면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전파루트는 중국→한국→일본으로 전해진 대승불교 문화권이다. 그런데 이 지역으로 불교가 전해진 시기가 남방지역보다 수세기나 늦은 까닭은 인도의 동북부 지방은 카라코람(Karakoram)이라는 산맥이 가로막혀 있어서 이 산맥을 넘고 다시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를 넘어 천산남로를 따라서 돈황을 거쳐 중국까지 이르는 길은 편도에만 3년 이상 걸리는 아주 험하고도 먼길이었기 때문이다.


1.중국에 전래

 

중국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인 원수(元狩) 2년(기원전 121년) 곽거병(곽去病)에 의해서라고 하는데, 그는 북방으로 출정하여 흉노족을 무찔러 크게 공을 세우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혼사왕(渾邪王)을 투항시키면서 금인(金人, 佛像)을 얻어 무제(武帝)에게 바쳤는데, 황제(皇帝)는 그 불상을 궁궐 안의 감천궁(甘泉宮)에 안치해 두고 아침저녁으로 정성으로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이보다 훨씬 늦은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서기 67)의 일이다. 후한서(後漢書) 서역전(西域傳) 천축국조(天竺國條)에 전하는 명제(明帝)의 감몽구법설(感夢救法說)에 의하면 황제가 어느 날 금인(金人)이 방광을 하면서 서방으로부터 황궁(皇宮)으로 하강하는 꿈을 꾸고 나서 신하들을 불러 꿈 얘기를 한 다음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어 불상과 경전을 얻어오도록 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고 서역으로 가던 채음과 진경 등 18명의 사신들은 중도에서 백마(白馬)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오는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만나 낙양(洛陽)으로 함께 동행하였더니 황제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드리고 문밖에 백마사(白馬寺)라는 절을 세우고 그들을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사찰로서 여기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불교는 소승불교이다.


중국에 오늘날과 같은 대승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 보급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80년이 지난 후한(後漢) 말 환제(桓帝) 때인 건화(建和) 2년(서기 147)으로 안식국(安食國, 페르시아)의 태자 출신 승려 안세고(安世高)에 의해서 최초로 경전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고 뒤 이어 들어온 대월지국(大月支國) 출신의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대승경전을 번역함으로서 대승불교의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안세고는 부왕이 돌아가시자 바로 출가하여 아비달마학(阿毘達摩學)과 선경(禪經)에 통달하여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부터 영제(靈帝) 때까지 20년 간을 오직 경전의 번역에 전념하여 사제경(四諦經)과 전법륜경(轉法輪經), 팔정도경(八正道經) 등 34부 40권의 근본교리를 번역하였고 지루가참은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과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수능엄경(首楞嚴經) 등 모두 13부 27권의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그 후 서기 220년 후한이 멸망하고 위(魏)·촉(觸)·오(吳) 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가 다시 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서진(西晉)시대가 열리는데, 이때부터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매개로 하여 불교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뒤이어 5호(胡) 16국 시대를 거쳐 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교 중심의 통치질서가 무너지고 사상적 혼란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되면서 급격히 퍼져나갔다.


그런데 불교가 여러 지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인도와 문화적인 차이가 심했던 스리랑카와 태국, 미얀마 등 남방국가에서는 팔리어로 집필된 경전을 자국어로 번역을 하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였으나 인도와 문화수준이 대등하였던 중국에서는 불교의 기본이 되는 사상적인 내용은 대체로 수용하면서도 일상생활과 관련된 내용들은 다분히 중국적인 토양에 적절하게 변모시켜서 번역을 하였다.


실례로 당시 중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유교사상(儒敎思想)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과의 조화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민간신앙과 결부하여 불교의 근본사상에서 다소 벗어나는 경전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다. 이와 같이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경전의 내용과 유사한 중국사상을 연관시켜서 각색(脚色)한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탄생지 인도로 구법승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후진(後秦) 홍시(弘始) 3년(서기 401년)에는 인도 출신의 승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대대적인 역경사업에 착수하여 용수(龍樹)의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을 번역하여 공관(空觀)을 찾고 법화경(法華經)과 열반경(涅槃經)을 번역하여 불성(佛性)의 논리를 찾는 등 점차적으로 불교 본래의 교학(敎學)체계와 정통의 교리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양 나라 무제(武帝) 때인 보광(寶光) 원년(서기 527년)에는 중국 선불교의 초조(初祖)가 된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스승의 유훈(遺訓)으로 중국에 선법을 전하기 위해서 수륙 양로로 3년 간의 긴 여정 끝에 양(梁) 나라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불심이 깊어 불심왕자로 존경받던 무제(武帝)가 금릉으로 대사를 불러 선문답을 나누었으나 대화과정에서 뜻을 이해하지 못한 무제가 오히려 달마를 괴승(怪僧)으로 여기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아직도 인연(因緣)이 이르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위(魏) 나라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 소림굴(小林窟)에서 면벽좌선(面壁坐禪) 9년 만에 혜가(慧可)를 만나 법을 전했는데, 이때 달마가 전한 선법(禪法)은 그때까지 교학불교에만 매달려 있던 불교의 개혁운동으로 승화되어 덕 높은 선승(禪僧)들이 다수 배출되면서 당 나라 말에는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종파로까지 번성하였다.


이후 중국불교는 현장(玄壯, 서기 600~664년)에 의해서 다시 한 단계 발전하게 되는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현장은 장안을 떠나 파미르고원을 넘고 사막을 횡단하여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들어가서 17년 동안 여러 유적지를 탐방한 후에 다시 네팔과 스리랑카 및 이란을 답사하고 서기 645년 불상(佛像) 8기와 657종의 불경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와서 평생동안 역경사업에 몰두하였다.


2.한반도에 전래

 

석가모니부처님에 의해서 인도에서 탄생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에는 무려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걸렸으나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왕실과 국가가 앞장서서 이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민간에까지 아주 쉽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신라(新羅)의 경우에는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다시 민간신앙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숱한 역경과 고난의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불교가 한반도에 최초로 도입된 연대가 문헌상에 나타나 있는 것은 4세기 후반 경 고구려를 시발점으로 백제와 신라의 순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여러 가지 자료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기록상 나타난 연대보다는 적어도 삼백여 년 전이고 도입경로도 육로가 아닌 해상으로 도입되어 일부계층에서 비공식적으로나마 신앙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의 남방전래설이다.


1) 삼국에 전래


(1) 고구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대삼국 중에서 가장먼저 불교를 받아드린 나라는 중국대륙과 접경되어 있던 고구려로서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서기 372)에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함께 순도(順道)라는 스님을 보내면서 다수의 불상(佛像)과 불경(佛經)을 보내왔는데, 이것이 역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으로서 해동(海東) 땅 한 반도에 심어진 불맥(佛脈)의 첫 걸음이다.


그리고 2년 뒤인 소수림왕 4년(서기 374)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중국에서 돌아 왔고 다시 그 이듬해인 서기 375에는 국가에서 성문사(省門寺, 肖門寺)라는 절을 지어 순도(順道)스님을 머무르게 하고 이불란사(伊佛蘭寺)라는 절을 지어 아도(阿道)화상을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기록으로 전하는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공식적인 사찰(寺刹)이다.


그런데 충(忠)과 효(孝)를 목숨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가히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불교를 별다를 저항과 반대도 없이 국가와 왕실이 앞장서서 그대로 받아 드린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으나 선진문화의 도입이라는 실리적인 목적 이외에 무력적으로 강국이었던 전진(前秦)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드린 정치적인 조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으로서도 당시 양자강 북쪽지방은 겨우 통일하였으나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동진(東晋)과 무력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시대상황에서 강력한 배후세력으로 그들의 동북방에 위치한 고구려에 대한 무력적인 견제의 목적과 함께 문화교류에 의한 관계개선이라는 두 가지의 커다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 불교를 방편(方便)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강하다.


이와 같이 국가가 앞장서서 불교를 수용하고 왕실의 지원아래 포교활동이 이루어지자 귀족층과 지식인들 사이에 급격히 전파되었으며, 기존의 민간경로를 통해서 들어와 있던 격의불교(格義佛敎)는 민간신앙과 결부되어 기복신앙으로 변모되었으나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는 승군을 조직하여 대항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가지게 되자 광개토대왕은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으라는 하교를 내리고 평양에 9개소의 절을 세웠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위한 불교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호국불교라는 미명아래 정권의 보호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영류왕과 보장왕 때에는 당 나라로부터 유교와 도교가 들어오자 많은 백성들은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유사종교를 신봉하였고 연개소문의 배불 정책이 강행되면서 결국 불교는 쇠퇴하고 뜻 있는 스님들은 부득이 백제와 신라 또는 일본으로 망명하기에 이르게 된다.


오두미도(五斗米道)는 중국 후한 때 생긴 종교 집단으로서 쌀 다섯 말(斗)을 바치면 도덕경을 읽고 부적을 먹으면서 기도로서 병을 고쳐준다는 도교(道敎)의 한 종파인데,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건의를 받아서 당 나라에서 도덕경과 함께 도사(道士) 8명을 데리고 와서 불교사원을 그들을 위한 도관(道館)으로 개조하여 거처케 하면서 민간에게 포교토록 하는 등 불교나 유교보다 우위에 두었던 사이비 종교집단이다.


(2) 백제
백제는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때로부터 12년이 지난 뒤인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원년(서기 384년)에 인도 출신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을 경유하여 황해를 건너 입국하였는데, 왕은 그들을 궁중으로 맞아드려 성대한 의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한산(漢山 지금의 廣州)에 불사(佛寺)를 지어 10명의 스님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포교토록 하였는데, 이것이 백제 최초의 공식적인 불교의 전래이다.


마라난타는 신통력(神通力)과 주술(呪術)에 매우 능하였기 때문에 그 신통력과 주술을 이용하여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빌도록 하였으며, 오랜 전란으로 인해서 동요하고 있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미륵신앙과 정토신앙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제17대 아신왕(阿莘王) 원년(서기 392)에는 백성들에게 '불교를 숭상하여 복(福)을 구하도록 하라'는 왕명을 내리는 등 국가가 앞장서서 불교를 신앙하도록 권장하였다.


이리하여 백제는 정치와 경제적인 면에서는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서 다소 뒤떨어졌으나 미륵신앙과 정토신앙이 결합한 실천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제26대 성왕은 금동불과 미륵석불을 일본으로 보내어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은 경론과 율사를 일본으로 보내어 일본불교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국내에 남긴 유적이나 유물보다 일본에서 더 많은 자취를 남기고 있다.


(3) 신라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에 비해서 무려 155년이나 늦은 제23대 법흥왕(法興王) 14년(서기 527)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다른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고구려가 불교를 도입하고 40여 년이 지난 이후부터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며, 삼국이 서로 대립하던 시대상황이라 공식적인 전파는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민간인들 사이에는 은밀하게 포교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실례로 제19대 눌지왕(訥祗王) 2년(서기 418)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 또는 墨胡子)스님이 선산의 모례(毛禮)라는 장자의 집(지금의 桃李寺)에 은거하면서 포교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신라 왕실에 향(香)의 용도를 알려주고 왕녀의 병을 고쳐주어 신임을 얻은 후 제21대 소지왕 때 다시 아도스님이 시자 3명을 데리고 모례(毛禮)네 집으로 와서 서민층을 상대로 전도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도리사(桃李寺)는 구미시(龜尾市, 당시一善郡) 해평면 태조산(太祖山)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제19대 눌지왕 2년(서기 418) 아도화상에 의해서 창건된 신라 최초의 사찰로서 화상이 참선을 하였다는 좌선대와 손가락으로 직지사 쪽을 가리켰다는 서대(西臺)가 있고 최근에는 도굴꾼에 의해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던 사리탑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사찰을 중수하고 적멸보궁을 새로 세우는 등 활기를 띄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먼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드리자 신라왕실에서도 불교를 수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으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부족합의제로서 보수성이 강한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를 거듭하였는데, 법흥왕(法興王) 14년(서기 527)에 있었던 우리나라 불교역사 천 육 백년 동안의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인 왕의 종질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불교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6세기 초반까지의 신라 사회는 6촌장 중심의 폐쇄적인 정치체제로 인하여 삼국 중에서 발전이 가장 뒤떨어진 약소국으로 남아있었으나 법흥왕이 등극하여 먼저 관제를 중국식으로 고치고 국력을 키우는데 힘을 기울이면서 보다 선진화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불교의 도입을 서둘렀으나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보수적인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번번이 좌절되었던 것이다.


이차돈(異次頓)은 법흥왕의 이러한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하여 스스로 순교할 것을 결심하고 자기의 뜻을 밝히면서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의 목을 쳐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법흥왕은 '경이 죽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 일도 아니고 짐(朕)이 불교를 펴고자 하는 뜻은 백성을 위한 것인데, 어찌 충신의 목을 벨 수 있으리요'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차돈은 스스로 순교할 구실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성밖에 있는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문무백관들이 놀라서 사실을 확인한 결과 왕명을 위조해서 공사를 기획한 것이다. 국법을 위반한 죄로 형장에 끌려온 그는 '무릇 성인의 가르침은 천신이 받드는 법인데, 만약 불교에 영험이 있다면 나의 죽음 후에 반드시 어떤 기적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문무백관들이 모두 모인 형장에서 형리(刑吏)가 칼을 들고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흰 피가 솟아오르고 머리는 금강산(金剛山)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이러한 순교 장면을 지켜보던 신하들은 하나같이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다시는 불교를 비방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한 금강산은 황성공원 남쪽에 있는 작은 산으로 정상에는 이차돈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백율사(柏栗寺)라는 절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법흥왕은 순교자 이차돈이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진리의 수레바퀴를 일으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금의 오릉 부근에 흥륜사(興輪寺)라는 절을 세우고 해마다 기일(忌日)이 되면 성대한 추모법회를 열었으며, 뒷날 법당 안에 법흥왕을 비롯해서 이차돈과 원효(元曉), 혜공(慧空) 등 열 사람의 영정을 벽화로 그려 봉안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절터의 위치 마저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법흥왕은 뒷날 스스로 왕위를 양위하고 법공(法空)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하여 흥륜사에서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이 절을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 하였으며, 왕이 출가하자 왕비 또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서 수도하였는데, 왕과 왕비의 이러한 불교 숭상의 정신은 국민정서 속에 그대로 이식되어 민족종교로서의 기틀을 이루고 나아가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남방전래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지금까지 문헌상에 나타나 있는 4세기 후반보다 적어도 삼백여 년이나 앞서 들어왔으며, 불교가 도입된 경로도 중국을 거쳐 육로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직접 바다를 통해서 배를 타고 들어왔을 것이라는 남방전래설(南方傳來說)이 상당히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사례를 통해서 그러한 학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첫째,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阿踰陀 Ayodhiya)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일행과 더불어 남해 해로를 통해서 가야국으로 상륙하여 김수로왕(金首露王)과 결혼하여 왕후가 되었다는 설로서 그때 허황옥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막기 위해서 파사석(婆娑石)으로 된 불탑을 배에 싣고 왔는데, 지금 김해에 있는 허 왕후의 능(陵) 앞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 바로 그때 가져온 파사석으로 만든 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허 왕후가 가야에 도착해서 불법(佛法)을 전한 것은 공식적인 불교의 전파라기보다는 사(私)적인 전래로서 궁궐 안에서만 주로 신앙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후 제8대 질지왕은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왕후사(王后寺)를 세우고 장유화상(長遊和尙)을 위해서 장유사(長遊寺)를 세웠으며, 그밖에 성조암(聖祖庵)과 해은사(海恩寺), 임강사(臨江寺)도 허 왕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왕비 허황옥(許黃玉)과 함께 왔던 왕자 허보옥(許寶玉)은 혼자 불모산(佛母山)으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해서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고 하며, 그는 만년에 가락국의 일곱 왕자들과 함께 육장산(六丈山)으로 들어가서 수행 정진한 결과 모두 부처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는데, 지금 경남 하동군에 있는 칠불암(七佛庵)터가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


둘째, 신라에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에 인도인들은 이미 신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인도의 마누(manu) 법전에는 신라를 '닭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는데, 시조 박혁거세가 닭의 알에서 나왔다는 설화와 관련시켜 볼 때 이해가 되는 부분이며, 신라의 서라벌(徐羅伐)이라는 이름도 기원정사가 있는 사위성(舍衛城, Sravasti)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셋째, 가야(伽倻)라는 지명은 원래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룬 성도지 붓다가야(Buddha-kaya)를 말하는 것으로 가야라는 나라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이다. 가야는 김수로왕이 서기 42년에 건국하여 서기 532년 법흥왕에게 합병될 때까지 490년 간 독립왕조로 존속하였으며, 이때 조성된 불교의 호국사상이 뒷날 신라 화랑도의 지도이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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